▲진승범(이우환경디자인(주) 대표·(사)한국조경사회 부회장)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소설가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황금대기(黃金臺記)’에 나오는 이야기.

‘세 명의 도둑이 있었다. 그들은 황금을 훔쳐 똑같이 나누어 갖기로 하고 고관의 무덤을 도굴하여 원하던 금괴를 손에 넣었다. 소굴로 돌아온 세 놈은 성공을 축하하는 축배를 들기로 했다. 그 중 하나가 술을 사러 나갔다. 축배를 들 술을 사오던 도둑에게 슬쩍 욕심이 생겼다. 두 놈이 죽으면 혼자 황금을 차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술에다 독약을 탔다. 그가 소굴에 돌아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두 도둑이 달려들어 그를 죽여 버렸다. 그가 술을 사서 오는 사이에 그를 죽이고 황금을 둘이서만 나누어 갖기로 작당을 한 거였다. 둘은 성공을 축하하며 죽은 도둑이 탄 독이든 술을 나누어 마시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지나가던 행인이 이를 발견하고 황금을 가지고 떠나버렸다. 결국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세 명의 도둑도 그들이 훔친 황금도.’

소설가 이정명은 장편소설 ‘천국의 소년(2013년)’에서 위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욕심을 내다 모든 것을 잃는 사람이나 상황은 3+1=0이란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말한다.

요란스레 청마(靑馬)의 기운(氣運)을 외치며 시작했던 2014년도 이제 한 달 남짓밖엔 남지 않았다. 올 한 해 ‘의욕(意欲)’과 ‘욕심(慾心)’을 혼동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성찰해볼 일이다. 내년 2015년은 조경계의 많은 단체가 새 집행부를 갖추어 출범한다. 이를 위해 각 단체마다 새로운 수장(首長)을 선출 하는 등의 준비가 올 해 있었으며, 이런 중에 기존 단체의 명칭 변경 논의, 통폐합 및 신규 단체의 출범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가까이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일부의 경우에서 의욕의 기운보다는 욕심의 그림자를 보고 3+1=0의 수식을 떠올린 것은 필자만의 기우(杞憂)이길 간절히 바란다.

조경이란 이름의(또는 조경에 기반을 둔) 단체의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가? 학술단체든 업계단체든 안으로는 조경의 질적 성장을 도모하고 밖으로는 조경과 조경인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앞장서는 것이 단체의 본질적인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체의 장은 개인의 명예나 이익과는 무관한 마음으로 오로지 이러한 본질적인 목표를 구현하는 일에만 매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그 단체에 사람이 모이고, 모인 이들의 뜻을 모아 하나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의욕과 욕심의 경계에서 바로 서고 바르게 움직일 수 있는 단체장이라야 단체의 구성원을 사적인 친소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뭉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의욕의 결과는 성과를 낳지만 욕심의 끝은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수장을 잘 뽑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단체의 구성원에게는 그와 걸맞은 책임과 의무는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흔히 단체의 구성원은 단체장 선출과 관련해 세 부류의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한 부류는 단체장과 친밀도를 가지며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유형이며, 다른 한 부류는 앞의 부류와는 대척점에 위치하여 단체의 일에 비판적이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유형이다. 나머지 한 부류는 그 단체장의 자질이나 추진하는 업무 등 단체의 모든 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방관자적 태도를 보이는 부류가 있다. 즉 잘하는지 못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전혀 하지 않는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부류 중 단체의 발전에 가장 해악한 집단은 세 번째 집단이다. 특히 단체장과 그 집행부가 대의와 순리가 아닌 사리사욕이나 편견에 의해 잘못된 방향으로 단체를 이끌어 가려 할 때, 이 집단의 방관자적 태도는 집행부로 하여금 무언의 동조로 인식하게 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 Arendt, 1906~1975)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에서 위의 세 번째 부류와 같은 집단의 행태를 ‘철저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로 규정하고 이것이 유대인 학살의 근본적인 원인이며 매우 중대한 악행(惡行)이라 지적한다. 1961년 12월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유태인 학살 범죄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본 아렌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철저한 무사유였다. (……)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된 일들이 유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유태인의 처지에서 자신이 수행할 일들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전혀 성찰하지도 반성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렌트는 바로 이것이야 말로 무사유의 전형이라 말한다.

사유(思惟)란 타자(他者)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며, 무사유란 타자의 처지에서 생각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의무이다. 누가 사심 없이 의욕을 갖고 단체를 이끌어갈 사람인지, 그렇게 뽑은 단체장이 가고 있는 방향이 올바른 곳을 향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지켜보고 함께하며 사유하는 조경인이 더욱 많아지길 소망해 본다.

천학비재(淺學菲才)한 필자가 ‘조경시대’ 필진(筆陣)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어느덧 마지막 졸고(拙稿)를 드린다. 조경인치고 조경을 사랑하지 않는 이 있을까마는 지독한 사랑앓이에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앞섰던 두서없는 글을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평소 좋아하는 조동화(1948~ ) 시인의 ‘나 하나 꽃 피어’라는 시(안철수는 이 시를 정계입문 출사표로 썼으나 필자는 물러가는 글로 올린다)로써 갈무리하고자 한다.

“나 하나 꽃 피어 /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 말하지 말아라 /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 결국 풀밭이 온통 /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 말하지 말아라 /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 결국 온 산이 활활 /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진승범(객원 논설위원·이우환경디자인(주) 대표·(사)한국조경사회 부회장)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