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한이 서린 곳
영월 청령포(명승 제50호)

▲ 영월 청령포(명승 제50호) 전경 <사진제공 문화재청>

 

▲ 영월 청령포(명승 제50호) 송림 <사진제공 문화재청>

 

 

영월 청령포는 평창강(西江)이 휘돌아 흘러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으로는 암벽이 솟아 있어 경관적으로 빼어난 곳이다. 이곳은 감입곡류하던 평창강이 청령포 부근에서 하천의 측방침식에 의해 유로가 변경되어 형성된 지역으로 영월 팔경 중의 하나다. 또 이곳은 단종이 처음 유배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청령포는 동·남·북 삼면에 깊은 강물이 둘러싸고 있고, 서쪽에는 육육봉의 절벽이 둘러있어 외부와 고립된 전형적인 유배지로 최적조건을 갖춘 곳이다. 단종은 이곳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처참한 유배생활을 했다. 청령포에는 청령포 금표비, 단종유지비, 관음송, 노산대, 망향탑 등이 있는데 모두가 단종의 유배생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 하겠다.

청령포 입구의 강변에는 비교적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중앙에는 단종어가가 있고 그 주위를 송림이 에워싸듯 펼쳐져 있다. 청령포의 해발고는 203m에 달하고, 남서쪽으로는 암벽이 솟아 있어 청령포를 휘감아 도는 평창강의 모습을 조망할 볼 수 있다.
청령포는 주변의 경관과 식생이 잘 유지 관리되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군락이 있다. 청령포의 유서깊은 소나무군락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나무 낙엽을 제거하고 초본류는 수시로 제거해주어야 한다. 또 청령포 한 가운데는 단종의 전설이 깃든 관음송이 자라고 있어, 송림(松林)의 의미를 한층 더하고 있다.

평지를 제외한 암벽 쪽의 경사지에는 떡갈나무와 물푸레나무 등의 낙엽활엽수가 자주 출현하고 있다. 관목류로는 회양목, 병꽃나무, 괴불나무, 박쥐나무 등이 분포하며, 초본류는 짚신나물, 질경이, 주름조개풀, 망초, 꿩의다리, 사위질빵, 고사리, 쇠무릎 등이 자라고 있다. 강가 주변에는 갯버들, 달뿌리풀, 뽕나무, 소리쟁이, 망초, 환삼덩굴, 금개국 등이 자라고 있다. 2000년 단종문화제와 때를 맞춰 건립된 단종어가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다.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으며, 어가 담장 안에 유지비각이 있다. 어가는 어가 또는 적소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과 주거형태, 어가의 위치 등 여러 가지 문제로 한동안 논란을 겪었으나, 현재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재현됐다. 금표비에 대한 기록을 보면 ‘관동지(關東誌)’에는 청령포 초입처에 작은 비가 있는데, ‘청령포 금표비’(淸泠浦 禁標碑)라는 여섯 글자를 새긴 것은 고판서 윤양래가 처음 설립한 것이라 하고 있다.

노산대는 청령포 서쪽의 높이 80m나 되는 절벽으로, 충신봉인 육육봉과 이어져 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청령포로 유배된 후 매일 이곳에 올라 한양 땅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 하여 노산대(魯山臺)라 불린다고 한다. 이곳에 오르면 광천리와 청령포 그리고 강 건너 일대의 전경이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오고, 넓은 백사장과 절벽을 휘감아 도는 맑은 강물이 아름답다.

기암절벽과 소나무가 조화를 이룬 동해안 절경
양양 하조대(명승 제68호)-

▲ 양양 하조대(명승 제68호) 전경 <사진제공 문화재청>

양양 하조대는 오대산에서 이어진 산자락이 동해바다와 만나는 곳에서 형성된 우뚝 솟은 기암절벽과 소나무가 조화를 이루는 동해안의 절경 중 하나며, 이곳을 다녀간 인물의 설화와 전설이 담겨있는 역사 문화경승지이다. 하조대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조준과 하륜이 이곳에 잠시 은거했다하여 두 사람의 성을 따서 ‘하조대’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하륜은 최영 장군의 요동공략이 불가하다고 반대하다가 양주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인물이고, 조준은 최영 장군의 휘하에 있다가 윤소종, 허금 등과 우왕의 폐위를 도모한 바 있던 사람이다.

고려왕조가 기울어 나라가 어지러워졌을 때 두 사람이 같이 벼슬을 버리고 명승지인 이곳을 찾아와 소요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새 왕조 건립을 위한 모사를 했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하조대를 함께 떠났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이곳에 있는 동안 혁명을 꾀했다고 하지만, 하조대는 깊은 시름을 안고 있는 두 사람에게 탁트인 바다와 주변의 절경으로 그들을 달래주었을 것이다. 하조대에 대한 조선중기 이식의 시를 보면 오늘과 다름없는 당시 경관을 추측할 수 있다.

하조대란 이 이름 시작된 게 언제인고 / 臺名河趙自何年
멋진 경치와 더불어서 성씨까지도 전해 오네 / 形勝兼將姓氏傳
엄청난 물결과 맞싸우며 천 길 우뚝 솟은 누대 / 屭屭千尋爭巨浪
한 굽이 돌 때마다 깊은 연못 물 고였네 / 灣洄一曲貯深淵
격류 속의 지주런가 처음에 눈을 의심타가 / 初疑砥柱當橫潰
문득 상전벽해(桑田碧海) 세월의 변천을 깨달았네 / 更覺桑田閱變遷
상구씨(爽鳩氏)가 이 즐거움 물려준 뒤로부터 / 從古爽鳩遺此樂
속인의 발길 그 얼마나 이 풍광을 좇았을꼬 / 幾人陳迹逐風煙

택당집 제5권_이식(李植)
(택당집 : 조선 중기 문신 이식의 문집, 1674년 초간 되었고 1747년 후손이 재간하였다. 34권17책)

하조대는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하조대에서 바닷바람을 쐬고 난 후 바로 옆 구름다리를 건너 10여m 쯤 절벽을 따라 들어가면 등대가 자리잡고 있다. 하조대에서 맞는 일출은 아름답고 장엄하기로 유명하여 일출을 보기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또한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바다를 비추는 등대 불빛을 보러 오는 관광객도 많다. 현재 이곳에는 하조대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육각정과 바닷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해안 절벽 끝자락에 있다. 하조대에 세워진 정자는 조선 초인 정종 때 건립되었다고 하며, 오랜 세월동안 중수를 거듭했다.

현재의 정자는 1998년 양양군에 초익공굴다리양식으로 복원한 것으로 건축물로서의 가치는 크지 않지만, 동해안의 빼어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명승지로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정자 입구에는 조선 숙종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이세근이 쓴 하조대가 암각된 바위가 놓여있다. 하조대 북쪽으로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진 하조대해수욕장이 유명하고, 남쪽으로는 작은 어항인 기사문항이 있다.

 <자료 제공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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