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3일 ‘조경인 뚜벅이 프로젝트’ 행사에 당사의 기술본부 직원들과 함께 참가했다. 전체 구간의 1/5정도 밖에 돌아보지 못하여 아쉬웠지만, 매년 학생들과 1박 2일 코스로 답사를 해왔던 필자로선 매우 익숙한 곳이었다.

1. 우포늪의 생성과정
한반도 남부지형이 형성되기 시작한 약 1억 4천만 년 전에, 지금의 영남지방 일원과 호남지방 대부분은 커다란 얕은 호수였다. 지금보다 기후가 온난했던 중생대에 강수량도 많아서 호수로 흘러드는 토사도 많았고 대홍수도 빈번하여 기저에는 상당량의 사암층과 역암층이 뒤섞인 퇴적암대가 발달하였다.

이 퇴적암층에 대규모 화산 폭발로 인한 화강암체(불국사통)가 관입하여 동쪽 지형을 형성하였고, 그 후 대량의 화산재가 퇴적하여 팔용산 응회암층이 형성되어 우포늪과 목포늪에 걸쳐져 있는 초곡리, 십이리, 대암리, 창녕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 후 중생대 상당기간에 걸쳐 지각변동에 따라 호수 기저층이 융기하여 오늘날의 영호남 지형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경도가 강한 화강암층과 상대적으로 경도가 무른 퇴적암층 경계의 단층지역에 깊게 패인 협곡이 발달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낙동강본류와 그 지류중 하나인 토평천(우포늪을 관통하는 하천)이 되었다.

1만 5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최대였을 때 해수면은 지금보다 100m 이상 낮았다. 이때 남해 바다는 낙동강 하구에서 60km나 떨어져 지금의 대마도 근처였을 것이다. 빙하가 녹기 시작하면서 1만 년 전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25m 아래, 8천 년 전에는 10m 아래까지 차올랐다. 6천 년 전쯤에야 비로소 현재의 모습으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빙하가 녹으면서 육지의 골짜기였던 낙동강 계곡으로 해수가 역류하여 낙동강 하구에서 160km 떨어진 경북 고령군까지 바닷물이 넘실댔다. 낙동강은 이때 강이 아니라 내륙의 좁은 만(灣)이었다. 바닷물이 역류하기 전까지 홍수가 나면 낙동강 상류의 토사는 강물에 실려 멀리 대마도 근처의 남해로 흘러갔으나, 바닷물이 역류한 다음에는 좁은 만의 바닥에 토사가 쌓여 낙동강 주변에 비옥하고 넓은 둑(자연 제방)을 만들게 되었다.

이때 낙동강 본류 주변에는 해발 14~17.5m 정도의 퇴적물이 쌓이고 본류에서 7km 가량 떨어진 우포 일대는 토사량이 적어 9.6m 정도가 쌓여, 홍수가 나면 낙동강물이 우포로 역류하고 평상시에 배수가 원활히 이루어 지지 않게 되어, 국내 최대 규모의 천변 배후 습지(자연내륙습지)로 발달하였다.

2. 우포늪의 수난의 역사
조선시대에는 소벌, 나무벌, 모래벌, 쪽지벌, 용장택, 이지포, 누포 등의 여러개의 자연 늪지가 있었으나,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이르러 지금의 우포늪 동쪽에 있는 대대제방을 축조하여 농지로 개간을 하면서 우포늪은 1/3가량 줄어들게 되었다.

그 후 3공화국 시절 도시의 산업화와 농경지 확장사업이 본격화되면서, 1973년부터 낙동강과 토평천에 제방이 만들어 지면서 주변에 널려있던 사몰포, 용호 등과 같은 크고 작은 대부분의 늪지들은 농경지로 변하여 영원히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늪지 주변의 원래 면적에 비하면 아마도 이 일대 자연습지면적은 절반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추측된다.

“증산, 수출, 건설”과 “새마을 운동”이 시대의 패러다임이었던 개발 광풍의 시대에 자연은 개발논리에 의해 무한 착취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우포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정부주도의 개발위주 정책에 반대하는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는 보호구역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예나 이제나 경제발전의 정책논리 앞에서는 그저 성가신 민원 정도로 밖에 치부되지 않는 현실이다.

어쨌든 여러 번의 공청회와 대화를 통하여 환경부는 1997년 7월 26일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하였고, 1998년 3월 2일에는 뒤늦게나마 람사협약에 등록하고, 1999년 2월 8일에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 이후 정부는 습지보호지역 내에서 농경지로 변경되었던 사유지 20만평을 사들여 현재 70여 만 평에 이르는 우포늪의 보전과 관리를 하고 있다.

현재에도 여러 곳에서 진행형인 개발과 보존의 갈등, 정부와 지역주민의 마찰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현실도 아니요 현대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다 근원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Homo Sapiens Sapiens 가 ‘만물의 영장’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서양 과학철학의 오만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다음 칼럼에서는 Thomas 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주제로 하여 이 문제를 좀 더 짚어 볼까 한다.

권오병(아썸 대표, 생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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