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에서 ‘Ecological Suicide’를 줄여서 Eco-cide라 하고 ‘생태적 자살’이라고 번역한다. 생명의 진화 초기단계에서부터 유래한 오래된 생명의 생존 수단의 하나이다.

초기 단세포 생명시절, 미약하기 그지없는 작은 생명체는 주어진 환경에 의해 가혹한 시련을 겪으며 존재해왔다. 조금만 외부 기온이 변하거나, 화학성분이 달라지면 생명체는 여지없이 휘둘리며 번식도 못한 채 죽어가기 일쑤였다.

이러한 상황이 닥칠 때 대부분의 개체는 죽어갔지만, 그중에 어떤 놈은 급박한 상황에서 스스로 자살을 택하여 자신의 영양물질을 주변 동료에게 아낌없이 나눠줌으로써 자신의 DNA를 보전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물론 처음부터 이타적인 마음으로 그리했는지는 확인 할 방법이 없으나, 결과론적으로 각자 혼자 힘으로 살고자 했던 부류보다는 두 셋의 세포가 하나로 합쳐지는 M&A 전략을 쓴 부류가 살아남았다. 이 전략이 바로 생명의 진화의 단초가 되었다. 두 개체가 하나로 합쳐져서 조금 더 환경에 적응할 힘이 생기고, 동종 간에서 우월적 생존력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것은 현재 생존하고 있는 모든 생물에서 반복되고 있다.

우리 몸은 약 20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에 약 100조개가 각자 맡은바 임무를 가지고 있는 기능성 세포들이고, 나머지 100조개가 각각의 세포를 연결하는 신경세포인 ‘뉴런세포’이다. 즉 인체는 100조개의 단세포 생물들의 집합체로써 ‘뇌’라는 사령탑에 의해 중앙집권적으로 통치되는 거대한 사회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는 각각의 수명이 있다. 예를 들면 혈액의 주요 구성물질인 적혈구는 평균 수명이 2달 정도로서, 생성된 지 60일 전후가 되어 기능의 저하되면 스스로 자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물론 DNA 복제로 자신과 똑같은 세포를 복제한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세포물질을 후임자에게 아낌없이 건네주고(약 98%의 물질), 폐기처분해야 할 2% 정도는 쓰레기가 되어 몸 밖으로 배출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여름방학 때 헤어졌다가 다음 학기에 다시 만난 친구들을 우리는 ‘괄목상대(刮目相對, 전과 달라진 상대방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 친구의 세포는 2달 전의 세포가 아닌 것이다.

모든 인체 세포는 이러한 시스템으로 설계되어 있는데, 간혹 어떠한 이유에서 이에 순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증식하고 자살하지 않으려는 세포가 있으니 이를 ‘암세포’라 한다. 그래서 암세포 자체는 병원균이 아니라 우리 몸 세포의 일부이지만 자기를 죽이지 못하고 계속 살아남겠다고 고집을 하는 바람에 아무 의미 없는 덩어리가 되어 다른 장기의 기능을 방해하게 돼 결과적으로 주인의 생명을 잃게 하고 종당에는 암세포 자신도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생명의 오묘한 이치는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늙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후대에게 물려주고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 우주의 섭리인 것이다. 그래서 속설에 고집스러운 사람이 암에 잘 걸린다고 한다.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거나 혼자만 독식하려는 욕심은 ‘생명의 법칙’에 위배된다고나 할까?

생태적 자살의 대표적인 사례는 ‘벌’들의 Eco-cide이다. 최근 필자가 사는 집 근처(양평군)에서 출근길에 수천마리의 아카시아 벌이 집단으로 땅에 떨어져 죽어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며칠 전부터 마당을 뭉치로 떼 지어 심란하게 돌아다니던 무리가 분명했다.

금년 6월 유난히 잦은 비와 흐린 날씨 탓에 아카시아 꽃이 제대로 개화하지 못하자, 아카시아 꿀을 주식량으로 하는 아카시아 벌은 1년 먹을 식량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1억 5천만년 이상 지구에 끈질기게 살아남은 벌은 이때 놀라운 선택을 한다. 알이 부화하는데 필요한 꿀을 최우선적으로 남기고, 알(후손, 자신의 복제된 DNA)을 돌보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필요 노동력만 남기고 나머지 벌들은 D-Day를 정해 벌통에서 500m 이상 떨어진 후미진 장소에 가서 모두 집단자살을 한다. 자기 벌통 안에서 굶어죽어 부패하면 안 되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자살하는 것이다.

이들이 벌통 안에서 어떠한 의사결정과정을 거쳐 살아남을 자와 죽을 자를 결정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벌들은 날개를 떠는 춤 동작과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을 이용해서 의사소통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벌들의 집단 안에 생식을 담당한 여왕벌과 수벌이 있고 일벌, 청소벌, 보모벌, 군인 벌, 집짓는 벌 등으로 역할 분담이 되어있지만 어디에도 대통령벌이나 국무총리벌은 없다. 거의 수평적인 평등 사회로 구성된 집단에서 리더나 대의원 없이 그들은 지혜롭게 열악한 환경에서 슬기롭게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태학에서 ‘곤충의 집단지성’이라 한다.

이러한 사례는 개미의 집단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장구한 세월을 지구생태계의 일원으로 온갖 환경재앙 속에서도 멸종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남은 그들을 보며, ‘인간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져본다. 인간은 식량부족 사태가 도래하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서 개체 수 조절을 하였다.

선사시대 이래 인간집단 사이에 발생했던 수많은 대량살륙(전쟁)은 생태적 시각으로 보면, 결국 한정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체 수 조절 행위였던 것이다. 이를 ‘Genocide(종의 대량학살)’라 하는데, 인류사는 곧 피비린내 나는 Genocide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 칼럼에서 이를 주제로 쓸 예정이다. 우주물리학의 천재라 불리는 아인슈타인 박사는 그의 저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지구에서 벌이 사라지면 4년 후에 인류는 멸종할 것이다”라고. 왜냐하면 인류가 섭취하는 식량의 약 40%는 벌에 의해 화수분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우리 집 호박은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기후변화로 인해 벌들의 개체수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호박잎을 따며 심란한 마음이 드는 건 나만 그런가?

권오병(아썸 대표, 생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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