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경계 입문과 초기
한국조경사회


1980년도 6월 한국조경사협회(당시 명칭)가 창설될 때 나는 한국도로공사 본사 조경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창립총회는 한국일보사 13층 홍실에서 하였는데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얼마동안 큰 활동 없이 지내다가 그 다음해 2월 처음으로 ‘조경사회보’가 창간되었고, 조경계와 회원 간의 정보교류가 이루어 진 셈이다.
나는 1970년대 초 조경분야가 정부의 국토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처음으로 관 주도 형태로 제도권 내로 도입될 당시에 이 분야에 발을 들여놓았다.(1972년 말 한국도로공사 조경부 입사)
우리나라가 경제개발 5개년(3차)계획에 의거 한창 산업화 과정을 거치고 있을 때였다.
나는 1982년에 10년간의 국영기업체(한국도로공사 조경부)를 그만두고 종합엔지니어링 회사인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KECC)에 경력직으로 입사해 오늘까지 재직하고 있다.
당시는 제5공화국 역점사업인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인 한강시민공원 조성사업 팀장으로 픽업되었던 것이다.
직장을 옮기고 국가정책사업을 하고, 국제적 행사인 ‘86아시안게임·88올림픽’에 이르기까지 여러 프로젝트에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실제로 조경사회와의 직접적인 인연은 제3대 서원우 회장(1985년) 때에 ‘건설기술용역품셈’ 개정 작업 때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조경분야의 건설기술용역 품셈은 따로 없었고 당시 도시계획 부문을 일부 인용해 쓰는 정도였다.
그래서 과학기술처 산하 ‘기술용역협회’ 주관으로 기술 분야별 용역품셈을 개정할 때였는데, 당시 나와 이자형 씨(삼림컨설탄트 이사) 등은 실제 엔지니어링 컨설팅회사에 다닌 관계로 직접 관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술용역품셈’ 작업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었다.
프로젝트 수행실적이 통계처리로 검증된 자료가 부족하고, 작업에 드는 경비(예산)도 없었으며, 업역 침범이라고 도시계획 전문분야의 반발도 거세고하여 쉽지 않았다.
결국 그것이 내가 회장 때인 1993년도에 완료되어 여러 기관에 인증을 거쳐 발간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물론 그 뒤 1차 개정이 있었음-상세한 것은 뒤에 서 기술할 것임)
그리고 제4대 이종필 회장(1987년 2월)때 감사직을 맡아 본격적으로 조경사회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 뒤 제5대 이재억 회장(1989년 3월)과 제6대 김윤제 회장(1991년 3월)때 부회장 직을 맡아 나름대로 회장단을 보필하며 조경사회 일에 열심히 임하려 했다.
그러나 사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본회가 그리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고, 명맥유지로 이어져오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래도 제5대 사무국장 강인철 씨와 제6대 사무국장 김현규 씨 등이 활발히 움직여 ‘조경사회보’ 발간은 꾸준히 이루어져 회원 상호간의 정보교류가 이루어진 셈이다.
그 후 나는 2대에 걸친 부회장직을 맡은 관계로 자연스레 회장(제7대·1993-1995)직을 맡게 되었다.

 

 

▲ 한국조경사회 최초 해외답사여행(백두산 식생조사)앞줄 우에서부터 임학제, 윤성수, 이재억, 뒷줄 우 유의열, 권오준, 서만영, 김성호, 이대구 회원

제7대 회장으로 취임
내가 제7대 회장으로 취임할 무렵은 우리나라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 새로운 사회를 열어 나갈 때였다. 그래서 당시 우스갯소리로 나를 문민회장(?)(그 전 5·6대 회장님이 군출신이었으므로)이라 하여 웃고 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회장 취임사에서 5가지 약속을 하고 새로운 변신을 하고자 노력했다.
첫째는, 이제까지 회원명부도 없이 회원확보를 외치는 것이 마땅치 않아 ‘회원명부’를 만들겠다고 하였고 둘째, 조경기술자들이 모여서 한마당 축제를 하는 체육대회(그 뒤 직장체육대회, 또 조경인 체육대회로 변경)를 갖자고 하였으며 셋째, 우리 기술자도 대학 교수들이 하는 심포지엄이나 세미나를 개최하여 과학·기술을 토론하고 발전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넷째는, 그동안 상당히 오래 끌었던 국토개발(조경) 표준품셈을 제정완료 하는 것이었고 마지막 약속은 우리도 정기적인 ‘해외답사여행(Technical excursion)’을 하는 것이었다.
제6대 김윤제 회장님과의 이·취임식은 강남역 부근의 과학기술회관 강당에서 이루어졌으며, 부회장에 유의열 사장(신화컨설팅), 박세순 사장, 유희철 씨(당시 한국토지개발공사 부장), 감사에 강인철 씨, 사무국장에 장대수 부장(KECC) 등이 선임되었다.

조경사회 처음으로 ‘회원명부’ 발간
취임 후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회원명부’ 발간이었다.
백방으로 조사 발굴하여 겨우 200명 정도를 정규회원으로 가입한 것으로 보고 일단 발간하기로 하였는데, 그것도 3월에 착수하여 그 해 10월에야 발간하게 되었다.
‘조경직장인 체육대회’를 제1회 ‘사회’행사로 전환
그 다음으로 춘계 ‘조경직장인 체육대회(초기명칭)’가 중요한 조경사회 행사였다.
본래 1993년 5월 한강 뚝섬 고수 부지 시민공원에서 처음 개최된 행사가 제1회 대회였으나, 실제로 그 2년 전(1991년)부터 ‘한국종합기술(장대수 부장 주관)’과 ‘도화종합기술(최종필 부장 주관)’의 조경부 직원들 간 친선 게임이 한강고수부지에서 2차례 열렸는데 그것이 ‘한국조경사회 체육대회’의 모체가 되었으므로 조경사회 주최로 된 1993년 행사를 제3회로 기록하게 된 것이다. 약 200여 명의 조경 직장인이 모여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당시 출전한 직장은 23개 회사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다음해는 광나루 고수부지에서 24개 직장이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뤘으며, 이것이 제4회 대회였다.
당시 조경사회 예산 부족으로 노천에 천막도 없이 치러진 1회 때를 생각하며 적은 경비를 활용해 처음으로 한국조경사회 이름의 대회 흰색 천막을 장만하여 내빈석에 설치하고 대회를 치른 것으로 기억된다.

최초로 ‘추계 심포지움 행사’를 용평리조트에서 개최
그 다음 중요한 행사로 1993년 10월 23~24일에 걸친 제1회 ‘93 한국조경사회 추계 심포지엄 행사’였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하여도 심포지엄이나 세미나 등은 학자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행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 기술인이 당해 연도 시행한 기술적인 문제와 앞으로 조경업계 발전을 위한 정책적 사항 등 학술대회에서 다룰 일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되어 처음으로 심포지엄 행사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막상 경비문제와 적은 집행부 인원 때문에 큰 고생을 하였다.
집행예산은 업계에 조금씩 지원을 받고, 일할 사람은 회장이 근무하는 KECC 조경부 직원을 총동원해 강원도 평창군 용평리조트에서 열었다.
당시에는 용평리조트가 국내에서 가장 앞서가는 리조트이고 조경이 잘 된 서구식 휴양지의 모델이었다. 용평 드래곤 호텔과 리조트 콘도 방을 빌려 숙박을 하였다.
당시 대회 프로그램을 소개하면 주제는 ‘21세기를 향한 한국조경계의 당면과제’였다.
제1분과 ‘한국의 환경 계획·설계의 당면 과제와 현실적 개선방안’의 발표자 이자형 상무, 토론자 이규목 교수(서울 시립대)와 김윤제 부사장(당시 우람종합조경), 제2분과 ‘한국 조경 시공·관리의 문제와 해결방안’의 발표자 이재근 전무(당시 한림종합조경), 토론자로 김봉년 과장(당시 한국도로공사), 김기성 소장(토문), 제3분과 ‘개방화시대 조류에 따른 조경업계의 대처방안’의 발표자 강인철 이사(신성), 토론자로 김유일 교수(성균관대), 이대성 사장(효신)이었다.
종합토론에는 안봉원 교수(경희대)와 최기수 교수(서울 시립대), 이용훈 상무(당시 동원종합조경)이었는데 발표·토론자의 면면을 보면 국내 조경 학계·업계의 실질적 대표급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전부 기술사 출신들로 이루어졌다.
축사는 오휘영 교수(당시 한양대)를 모셨는데 바쁘신 중에도 용평까지 오셔서 1박까지 하며 열성적으로 한국조경사회를 격려해 주셨다.
또 잊을 수 없는 사건은 특별강연으로 (주)대지개발의 고 이철호 사장이 자사 제품인 ‘생명토’와 ‘생명정’을 소개하면서 실제로 그 제품 내용물을 입에 넣으면서 (깨끗하다고?) 열강을 하던 기억이 남는다.
저녁 6-7시 늦가을의 어둠이 깔리고 심포지엄은 끝이 났는데 밤에는 ‘조경인의 밤’ 만찬이 개최되어 각종 장기자랑 끝에 특등상(자전거)은 안계동 소장(동심원)이 차지하여 버스에 태워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튿날은 주변 사적(오대산 월정사) 탐방 및 골프운동으로 마무리하고 중식 후 서울로 상경하였다.
한국조경사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 많은 관심과 또 명승지에서 1박을 한다는 기대감에 모두 들뜬 기분으로, 즐거운 가운데 성황리에 행사를 마무리 하였다.
‘백두산 식생조사’ 명목의 해외학술답사 처음 시도
그 다음 주요 행사는 1993년 6월의 한국조경사회 해외기술답사가 처음으로 ‘백두산 식생조사’ 명목으로 중국에 간 일이다.
당시에는 중국에도 어렵게 갔지만 요즈음 같이 자주 갈 수 없고 특히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등정은 과감하고도 도전적인 행사 시도였다.
물론 경비나 시간 때문에 여러 명이 참여치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매우 유익한 여행이었다.
모두 9명으로 조직된 기술답사팀은 천진비행장에 내려 미니버스를 이용해 북경으로 3-4시간 달려서 도착하고 그 곳에서 3박을 하며 주변관광지(만리장성, 이화원, 자금성 등)를 두루 견학했다.
그리고는 심양, 장춘을 거쳐 기차(사회주의 기차는 처음 타봄)를 10시간 가량타고 조선족 자치구인 길림성 연변에 도착하여 백두산과 인근 국경지역 도문의 두만강을 구경하고, 중국 옛 고도인 서안을 거쳐 10일 정도의 일정을 잘 끝내고 돌아왔다.
답사에 참가한 분은 이재억 전 회장, 권오준 회장, 유의열 부회장, 윤성수 사장, 임학제 사장, 서만영 사장, 이대구 전무 외 두 분까지 9명이었다.

 

 

 

 

▲ 제4회 조경인 체육대회(1994년 5, 광나루 고수부지)좌로부터 장대수 사회, 유의열, 오휘영 교수, 권오준 회장, 양병이 학회장, 김윤제

국토개발(조경) 표준품셈 제작 발간
마지막으로 약속한 것은 엔지니어링 사업의 국토개발 표준품셈의 제작 완료였다.
실제로 국토개발 표준품셈의 1차 제작은 1983년도(한국기술용역협회제정: 과학기술처 장관승인)였으며, 그 당시 품에는 조경이 따로 없었고 도시계획 분야에서 임의로 만들어 과학기술처 승인을 거쳐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때 품셈작업은 조경부문의 설계 용역품을 새로 삽입하겠다는 개정작업이었다.
이것이 있어야 한국 조경 엔지니어링 분야의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본적 토대가 되기 때문에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과제였다.
이 사업은 당초 제3대 이종필 회장 시절부터 거론은 되었으나 누가 실제로 담당할 사람이 없었고, 그나마 초기에는 ‘한국종합조경공사’에서 김학범 교수, 이재근 교수(두 분 모두 당시 한국종합조경공사 과장) 등이 초안을 만들어 본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 제4대 서원우 회장 때 본격적으로 하려고 모였었다.
여러 명이 각 분야별로 맡아서 하기로 하고 시작하였으나, 모든 것이 자료가 부족하여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내가 엔지니어링 회사에 임원으로서 조경부서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실적자료와 산하 직원이 있어 처음에는 내가 총괄업무를 담당하였다.
그것이 제5대 이재억 회장, 제6대 김윤제 회장 때까지 결론을 못 내리고 지지부진하다가 결국은 내가 회장으로 취임하던 그 해 12월 3일 전면 개정으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다.
품셈작업 때문에 많은 분들이 고생을 했지만, 특히 이자형 이사가 생각난다.
엔지니어링 회사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나와 이자형 씨가 주축이 되었고, 당시 하도 실적이 오르지 않아 이자형 이사에게 별도 아웃소싱을 준 것으로 기억난다.
몇 달의 여관작업을 거쳐 완료한 건을 ‘도시계획기술사회’와 협의를 거칠 때는 더 어려웠다. 한국기술용역협회(당시 명칭) 회의실에서 도시계획과 조경, 두 분야가 모였는데 도시계획기술사들은 10여 명 가까이 되었고, 조경기술사들은 나를 위시한 3-4명 정도였는데, 상호 업역 확보를 위해 전쟁과 같이 언성을 높여 싸웠다.
당시 도시계획 쪽에서 가장 강력히 반대하던 사람은 최병기 기술사, 좀 우호적인 사람이 조현세(서울대 환경대학원출신으로 조경에 대한 지식이 있었음) 기술사였다.
우여곡절 끝에 논란을 거쳐 품셈은 제작되었고 한국 조경산업에서 최초로 조경분야(공원, 관광지, 휴양지 등) 기술 용역품을 적산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가 생긴 것이다.
그 품셈 덕택으로 그 전까지 공원계획 등의 조경기술 용역비가 3배 가까이 올라가서 많은 기술용역회사(기술사사무소 포함)들이 수혜를 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품셈작업이 완료되기까지 거의 6-7년 가까운 세월이 소요되었는데 그 방대한 자료(외국자료 포함)와 실적통계치의 정리를 위해 당시 수고해 주신 많은 분들께 이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주마등처럼 지나간 옛 일들을 일지식으로 나열하여 보았다.

한국조경사회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있기를…
조경산업이 70년대 초 한국사회에 첫 발을 고 거의 40년 가까이 된 지금의 현실은 많은 발전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초기에는 조경 산업 그 자체가 맨 주먹이었다.
시공은 그런대로 조금 빨리 시작됐지만, 엔지니어링 산업은 80년대 중반에야 시작되었다.
지나고 보니 당시 내 나이 40대 후반(48-50세)이었으니 한참 왕성하게 일을 벌일 때이고 보면 정신없이 한 것 같다.
내가 그 당시 엔지니어링(KECC) 회사에 재직 중이면서 조경 부서장을 맡은 것이 도움이 되어, 행사 때마다 부하직원들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행된 것 같고, 특히 당시 사무국장인 장대수 부장(당시 KECC 조경부)이 많은 수고를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추억의 한 장(章)이 되었지만, 재임 2년간 무언가 변화하고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벌였고, 그 때 그 시절이 당시로는 어려웠지만 지금은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
내 재임기간 중 부족한 사람을 믿고 도와준 모든 관련 조경인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말씀드리고, 항상 발전 있으시길 기원하는 바이다. 그리고 금번 한국조경사회 3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매진하시는 김경윤 회장을 비롯한 집행부 여러 임원들의 노고를 치하 드리면서 이만 졸필을 마치려한다.
앞으로 우리 ‘한국조경사회’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이 있기를 기원해본다.

 

권오준(제7대 (사)한국조경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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