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 Times ] 다산 정약용은 숫자 18과 인연이 많다. 18세 되는 해에 성균관에서 시행한 진사과 시험을 통과했고 정조대왕과 함께 벼슬 생활한 기간이 18년이다. 이후 1801년에 유배되어 18년간 긴 생활을 하게 되며 유배 기간에 18명의 제자를 거두었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난 때가 1818년 순조 18년이며 이후 18년의 삶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평생 정원을 조성하며 전원생활의 여유를 즐겼던 다산의 삶은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노년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채화정(菜花亭) 정원

18년의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귀향한 다산은 3년이 지난 1821년 본가(여유당) 동쪽 100m 지점 개천가에 정자를 짓고 정원을 조성하였다. 현재의 남양주시 정약용 유적지 내 다산문화관 주변이다. 푸성귀를 얻을 수 있는 남새밭을 조성하고 그 옆에 정자를 세웠는데 이름을 채화정(菜花亭)이라 했다. 남새밭에는 오이와 가지 등 채소를 심고 저절로 나는 명아주, 비름나물, 냉이 등을 가꾸었다. 여기에 꽃나무 100여 그루와 매화나무, 복숭아나무, 파초 등을 더하여 심고 정원을 조성하였다. 이중 파초는 다산이 정원에 즐겨 심었는데 형태는 바나나와 같으나 다른 종이다. 당시 궁중이나 선비들이 즐겨 심은 식물로 이국적인 모습에 취하고 큰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아열대성 식물이다.

다산은 늘 채화정에서 거문고를 타며 글을 읽고 시를 지으며 지난 18년의 길고 긴 유배 생활을 회상하며 노년의 여유시간을 보냈다. 채소꽃을 찾아 날아온 나비를 즐기고 오이꽃 풍경을 기록하며 전원생활의 여유를 즐기었다. 손님이 찾아오면 채화정에서 맞이하고 차를 나누며 시를 지었는데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다산은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한결같이 정원을 조성하였다. 부친의 근무지에서 생활하던 화순과 예천에서 그러하였고 한양에 거처할 때는 앞마당의 반을 내어 정원으로 조성하고 당호를 죽란사(竹欄舍)라 했다. 황해도 곡산부사로 재임하면서는 두 아들을 위해 정자를 세우고 정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강진의 귤동마을 산정에서 유배 생활하던 시기에는 석가산과 화계, 연지를 조성하고 인근 백련사 스님한테 연뿌리를 얻어, 심고 자신만의 이상향을 연출하며 정원을 조성하고 이 모든 내용을 글로 남기었다.

지금은 채화정을 찾을 수 없다. 다산의 기록에서만 볼 수 있는데 다산 유적지를 조성하면서 정자와 정원을 복원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정원은 큰돈 들이지 않고도 조성할 수 있는데 아쉬움이 크다. 이제라도 다산이 세웠던 정자와 정원을 복원하여 정원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다산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길 희망해 본다.

다산의 마을이 그려진 '두강승유도'(이건필, 실학박물관 소장)
다산의 마을이 그려진 '두강승유도'(이건필, 실학박물관 소장)

오엽정(五葉亭) 정원

실학자로 경제관념이 강했던 다산은 귀향 후 두 아들과 함께 인삼 농사를 지었다. 인삼밭은 여유당 서쪽 강 건너 검단산 북쪽 자락 현재 팔당댐 서쪽에 자리했다. 다산은 인삼밭 옆에 삿갓만 한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이름을 수초루(守草樓)라 했다. 1827년 다산이 66세 되던 해 수초루를 오엽정으로 바꾸고 편액을 달았다. 수초루는 인삼밭을 지키는 정자란 의미고 오엽정은 삼아오엽(三椏五葉) 즉 세 갈래 가지와 다섯 잎사귀로 잎이 다섯인 인삼을 의미한다. 오엽정은 다산의 실학사상과 관계가 깊다. 평소 돈이 되는 상업적인 농사를 중요하게 주장한 다산답게 인삼밭을 경영한 것이다. 당시 다산의 집안은 형편이 괜찮았다. 여름에 삼베옷을 입고 가을엔 겹옷을 입었다. 끼니마다 고깃국이 올라왔다. 다산은 자신의 시 ‘오엽정에 대한 노래’에서 형편이 좋아 배부르고 등 따신 데 늙은이 식탐이 많아 고기를 찾는다고 했다. 이 시기에 다산은 인삼 농사에 전념하였던 것 같다. 전국의 명소를 찾아 즐기며 유람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인삼 수확 시기에 도둑이 문제였던 것 같다. 최소 3년 이상 키워야 상품화가 가능한 농사일이라 다산 역시 오엽정을 인삼밭 지키는 초소로 이용하며 한편으로 자연 속 정원으로 인식하였다. 오엽정이 작고 보잘것없는 정자였으나 다산은 이곳에서 수려한 고향 마을 풍경을 벗 삼아 자연경관을 즐기고 시를 지었다. 발아래 풍경을 차경하여 정자로 끌어들이고 물안개 자욱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감사했다. 다산은 오엽정에서 삼정십영(蔘亭十詠), 재첩(再疊) 등의 시를 짓고 삼포(인삼밭)의 풍경을 즐겼다. 지금은 오엽정의 위치를 찾을 수 없다. 추측건대 수목이 울창한 수림대가 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산수록재(山水綠齋)

다산은 전국의 이름난 정원과 정자를 유람하며 속세를 떠나 자기 마음대로 자유로운 마음 편한 삶을 즐기었다. 다산은 자신의 품성과 어울리는 꿈이 있었다. 물 위에 떠 있는 집 부가범택(浮家汎宅)을 갖는 것이다. 물에 떠다니며 배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유람을 즐기는 선상의 생활을 염원했다. 다산은 배 한 척을 구입하여 그물과 낚싯대를 갖추고 솥과 술잔, 밥상 등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준비하고 배에는 온돌을 갖춘 방 한 칸을 두며 아내와 어린 종을 데리고 부가범택으로 강물을 따라 유람하고자 했다. 배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물 위에서 잠을 자고 물결에 떠다니는 오리들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며 시(詩)를 짓고 시절을 노래하는 것을 소원하였다. 다산이 부가범택을 갖고자 했던 소원은 장지화(張志和)의 영향이 컸다. 장지화는 당나라 때의 사람으로 스스로 호를 연파조수(煙波釣叟)라 했다. 연파조수는 ‘연무 가득한 물결에서 낚시하는 늙은이’라는 뜻으로 세상을 등지고 영화를 바라지 않는 숨어 사는 은사(隱士)를 비유한 말이다. 장지화는 관직에서 물러나 부가범택으로 전국을 유람한 인물이다.  

다산은 꿈을 이루기 위해 정조대왕이 붕어하기 수년 전 편액을 만들었다. 당호를 ‘초상연파조수지가(苕上煙波釣叟之家)’라하고 장인을 시켜 편액을 만들게 했다. 편액의 의미는 ‘물안개 가득한 초천의 개천에서 낚시하는 늙은이의 물 위에 떠 있는 집’이란 뜻이다. 편액을 보관한 지 수년이 지나 세상이 점점 정쟁으로 흉흉해지고 어지러워지자 정조 24년(1800) 4월에 처자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배를 건조하려고 준비하였는데 임금의 입궐하라는 어명이 있어 한양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다산은 한양으로 올라가며 창고에 보관 중인 편액을 꺼내 뒷동산의 정자에 걸었다. 그리고 언제인가 꼭 소원을 이루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 연유를 기록하였다.

다산의 소원은 이로부터 23년이 지나 이루어진다. 1823년 다산은 큰형님이 장손자 대림(大林)을 장가보내며 춘천으로 손자며느리를 맞으러 떠나는 때에 부가범택을 만들었다. 먼저 큼직한 고기잡이배 한 척을 구입하여 집처럼 꾸몄다. 문 위에 가로 댄 나무에는 다산이 직접 쓴 ‘산수록재(山水綠齋)’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 좌우 기둥에 ‘장지화가 초삽에서 노닌 취미(張志和苕霅之趣)’와 ‘예원진이 호묘에서 노닌 정취(倪元鎭湖泖之情)’라 한자를 써 주련을 달았다. 배에는 천막과 침구, 필기구 그리고 서적에서부터 약탕관과 다관(茶罐), 밥솥, 국솥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곡운필구곡도첩(谷雲筆九曲圖帖, 조세걸)의 농수정(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곡운필구곡도첩(谷雲筆九曲圖帖, 조세걸)의 농수정(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다산은 춘천을 여행할 때 화공을 데려갈 참이었다. 산수화에 능한 선비 방우도(方禹度)를 동행하 했는데 말이 오고 간 뒤 며칠도 되지 않아 병이 생겨 대동하지 못하였다. 다산은 이때 12일간 북한강을 따라 일엽편주에 몸을 의지하여 여러 곳을 여행한다. 춘천의 소양정에 오르고 고려시대 정원으로 유명한 청평사(淸平寺)를 찾았고 화천에 김수증(1624∼1701)이 경영한 곡운구곡과 농수정을 유람하였다. 다산이 30여 년 만에 소원을 이룬 것이다. 전국을 유랑한 다산이 말년에 소원하였던 부가범택(수상가옥)을 준비하고 가족 친지와 친한 벗을 대동하여 바람과 같이 물을 따라 유랑하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으니 지금 생각해 봐도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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