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고산 윤선도의 ‘산수지벽’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산수지벽’은 시경, 성과 경, 출처관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산수지벽(山水之癖)이 있어 재물을 속바치며 원림을 조성하고 경영한 고산이다. 무엇이 고산을 고치기 어려울 정도로 굳어진 버릇이며, 지나치게 즐기는 병을 의미하는 ‘벽(癖)’에 빠지게 하였을까. 우선 원림을 나지막이 읊조리며 천천히 완만하게 걷는 미음완보(微吟緩步)로 거닐면서 시경(詩境)의 세계에 드는 행위를 먼저 떠올릴 수 있겠다. 고산에게 시경의 추구는 영혼을 맑게 하는 구원의 경건함과 성스러움을 동시에 구현하는 방법이다.

원림에서 ‘하루에 한번씩’인 ‘일일래(日一來)’와 ‘매일같이 가고오는’ ‘일왕래(日往來)’의 ‘리추얼라이프(Ritual Life)’의 실행도 하나이다.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규칙적인 의식인 리추얼라이프의 실행이야말로 원림 향유의 고전적 원형을 제대로 보여준다. 윤선도는 성(誠)과 경(敬)의 유교적 자산을 바탕으로 매일 정성스러움을 모아 ‘벽’을 녹슬지 않고 반짝이는 매력으로 다독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산의 ‘산수벽’은 철저한 자기관리와 뛰어난 학문적 성취로 ‘도가 트인’ 완벽한 도통의 세계관을 지닌 남다른 출처관(出處觀)에 기인한다. 나아가 정사에 참여하는 출(出)이 아니라면, 명료하게 은거하며 심신 수양하는 처(處)를 치열하게 갈구한 것이다. 그에게 처는 곧 숨어사는 ‘은(隱)’을 의미하며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활달한 ‘은’의 실천으로 원림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린다. 고산의 원림 경영은 처의 실현으로 조영하고 출의 기백으로 경영하는 지점에 놓였음이 그 특징으로 뚜렷하게 인식된다.

 

아낌없는 투자로 풍요로운 원림의 성취

고산은 남이 보기에 어리석을 정도로 지나치게 원림 조영과 경영에 빠진다. 정치적 뜻을 달리하는 정적에게 긴장하지 말라는 전갈을 수시로 보낸다. 어처구니없는 수준을 연출할 정도로 섣부르다. 야무지지 못하고 곳곳에 허점 투성이로 내비친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시경과 성과 경의 질박하고 은은한 성취로 깨달음의 미소를 짓고 있다.

 

내가 휘수정(揮手亭)과 회심당(會心堂)을 경영하려는 마음은, 마치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생각하는 것과 같으나, 한해의 농사가 마침 크게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때라서, 공역(工役)에 필요한 식량을 마련할 길이 없기에, 장획(臧獲) 몇 구(口)를 속바치게 하여 공사 비용을 충당하려고 한다. (출처 : 금쇄동기)

 

고산이 원림을 조성하고 경영하는 마음의 출발점이 ‘마치 목마르고 굶주린 자가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생각하는 것과 같’으니 그 절실함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의 가장 다급함에 닿았다. 기갈자가 음식 생각하는 것이 뭐가 이상할까. 산수, 천석, 원림을 대하는 고산의 정서는 몹시 기갈난 상태이다. 흉년이 들어 세상이 어려운 시절이다. 큰 재산에 해당하는 노비(장획) 몇으로 재물을 대신 갚는다. 당대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경제적 행위를 거침없이 행사한다. 조경 비용을 최대한 아끼려는 이 시대의 조경 행위는 그런 면에서 궁상맞다.

 

천석(泉石)이 또한 내 마음속에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 장획을 헐값으로 마구 내놓아 도모하려고까지 하니, 나의 산수(山水)에 대한 고질병이 너무 과한 것은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비웃을 것은 물론이지만, 나 역시 자조(自嘲)의 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긴 하지만 옛사람이 말하기를 “고기가 없으면 살이 마를 뿐이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마음이 비속해진다.”라고 하였으니, 장획은 비유하면 고기라고 할 것이요, 천석은 비유하면 대나무라고 할 것이다. (출처 : 금쇄동기)

 

천석이라고 지칭하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산중 원림은 내 가까이 있는 귀중한 물건, 또는 어떤 일이나 상황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림 조영을 도모하기 위하여 재산을 급하게 헐값으로 내놓는다. 금쇄동기에는 헐값으로 마구 판다는 ‘척매斥賣’로 표현하였다. 이어서 산수에 대한 고질병이라는 ‘산수지벽(山水之癖)’을 고백한다.

고산은 여기서 원림을 천석(泉石)이라고도 하고 산수(山水)라고도 부르며 문장에서 의미는 같으나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다. 이미 과하지 않겠는가라고 스스로 판단하며 남이 비웃고 나 또한 나를 비웃는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소식(1037~1101)의 시를 인용하여 재물은 다시 쌓으면 되지만 원림이 비속해지는 것은 고칠 수 없는 일로 처음 조성할 때의 풍요로운 지원과 공세를 적확하게 제시한다.

 

일시적 경관을 위한 최소한의 인위적 조치

원림의 직접 체험을 통한 풍류나 공간을 군신이 함께 흉중구학에 새기는 유교적 풍류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금쇄동 원림의 휘수정 공간이다. 휘수정 주변은 금쇄동 원림의 백미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발견만 한 것이 아니라 폭포의 경관 연출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물길을 모은 흔적이 바위에 남았다. 일시적 경관을 보다 풍요롭게 즐기기 위한 최소한의 인위적 행위이다.

휘수정 앞면 북동쪽은 주변의 폭넓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풍류의 조망 공간이다. 특히, 고산의 원림조영 행위는 미음완보와 멀리 있는 경관을 조망하고 휴식하는 풍류의 행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래에서 오는 자가 이곳에 이르면 어느새 이 구역이 묘연(杳然)하여 신관(神觀)이 상쾌한 것을 깨닫고는 문득 세상을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겠기에 그 정자를 휘수(揮手)라고 명명하려 한다. 또 월출암(月出巖)의 북쪽에 작은 집을 지어, 편히 앉아서 정신을 기르는 장소로 삼고, 그 집을 회심(會心)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출처 : 금쇄동기)

 

고산이 풍류의 공간으로 가장 높이 평가한 곳은 휘수정과 그 뒤에 보이는 병풍폭포와 높은 수직의 벽이다. 휘수(揮手)는 손을 흔드는 일이다. 세상을 버리고 싶은 생각에 손을 흔든다면 더 이상 세상과 만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회심(會心)은 마음에 딱 들어맞는다는 말이다. 편히 쉬며 마음을 다스려 정신을 수양하기에 딱 들어맞는 공간이라고 여겼다. 비가 와서 풍부한 수량으로 경관을 풍요롭게 하는 공간이면서 세상과 절연하는 휘수정, 그리고 수심의 공간으로 아늑한 느낌을 주는 회심당 모두 일시적 경관으로 마음의 깊이를 챙겨주는 곳이다.

 

태풍 지나간 원림의 일시적 경관의 출현

태풍 지나간 원림은 남다른 경관이다. 우후죽순 자란 숲처럼 눈길 잡아끄는 푸른 낙엽이 산길로 그득하다.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솔가지, 밤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 바닥을 덮었다. 뒤집혀 회백이거나 연녹인 채 진한 녹색과 중층으로 산길을 덮었다. 빈틈 없는 녹색 낙엽 카펫이다. 촘촘하게 솔가지와 솔잎이 빈자리를 메운다.

황토빛 반짝이던 숲길은 온화한 거닐기 매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눈매가 늘 안정적이었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의심 없이 황토색의 안온함에 생명의 약동하는 근원적인 힘인 ‘엘랑비탈’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녹색 낙엽 카펫으로 덮인 태풍 지나간 원림 바닥의 새로운 경관은 ‘생기발랄’로 가득하다. 생동하는 그 느낌이 ‘엘랑비탈’보다 한결 친근하게 다가선다.

 

태풍 지나가니 - 임천한흥.209 / 온형근

 

난봉꾼 집 들쑤셔 놓은 부산하고 왁자한

압수 수색 포탈 세금 딱지도 못 따라간다.

 

​임천으로 뒤범벅 우수수 어수선 떨어진

총체적 몸부림은 산길 가득 채운 정한

 

크고 작고 두껍고 얇으며 굵고 가는

잎과 가지와 심지어 제자리 틀던 줄기까지

뒤집히거나 모로 눕고 들뜨거나 중층으로

뭉쳐 있거나 낱 것으로 종횡을 무릅쓰고

맨바닥 쌓거니 솔가지 채우며 두툼하기까지

 

간간이 반짝이며 인기척 내던 도토리는

기어코 꼭꼭 숨겨 기약의 도모에 든다.

태풍이 거느린 바람은 산길을 푸르게

황토색 가리고 녹색의 수를 놓으며 색을 바꾼다.

 

잠시 머뭇댄 그 틈새에 거미줄 다시 그었다.

-(2022.09.07.)

 

지금까지는 황토의 안온함에 생기발랄을 만끽하던 일상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또 다른 생경한 경관에 직면한다. 사람의 길인 산길과 숲 생명의 길인 숲길 모두 녹색으로 가득하다. 햇살 다가가 반사하는 숲 그늘과 쨍쨍하고 빛나는 환함이 은은하고 깊이 있게 뿜어내는 ‘녹녹녹 경관’의 출현이다.

 

내원재의 일시적 경관(2022.9.9) / 유현재의 일시적 경관(2022.9.7)
내원재의 일시적 경관(2022.9.9) / 유현재의 일시적 경관(2022.9.7)

 

 

숲의 빈자리를 태풍 지나간 흔적이 채운다. 일생에서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환호한다. 생기발랄의 기운이다. 샘 솟는다. 파묻히고 삭기 전 ‘잠깐의 경관(일시적 경관)’이다. 두근두근 내 안의 햇살과 그늘이 직조하는 눈부심이다. 그러니까 모든 녹색은 황토색을 지향한다. 시시각각 호시탐탐 할 수만 있다면, 지나치더라도 언젠가는 황토로 돌아가는 초지일관이다. 이 새로운 경관인 ‘녹녹녹’도 태풍 지난 팽팽한 햇살로 금방 시들어 말라들 것이다. 그러니 ‘잠깐의 경관’에 텀벙 잠겨 헤어나질 못한다.

‘녹녹녹’은 다시 황토를 그리워하고 수시로 덮으려 기회를 노린다. 키 큰 교목은 고개를 쭉 빼들고 태풍을 맞이한 셈이다. 상처 난 가지 마른 가지 빽빽한 가지 뚜둑 뚝 꺾인다. 꽉 찬 수관 성긴 수관으로 바람이 송송 들락댄다. 막힌 바람 소리가 숑숑 뚫린 시원한 바람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펼쳐져 날린다.

이 또한 ‘잠깐의 경관’이다. 열린원림 향유에서 생기발랄은 일시적 경관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세밀하고 정성스러운 '알아차림'에서 일시적 경관이 피어난다는 사실을 원림에 새긴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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