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겸 박사
이태겸 박사

도시미화운동(City Beautiful Movement)은 혁신주의(Progressivism)라는 사회적 운동을 배경으로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사회통합과 개선’에 관한 이념을 담은 혁신주의 운동은 도시의 물리적 환경개선과 도덕적 질서 회복이 상호보완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시대적 인식과 함께, 남북전쟁 이후 혼란했던 미국 전역에서 유행하였다.

도시미화운동 당시 도시·건축·조경가 및 예술가들은 작은 정원의 설계, 조성에서부터 도시설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 기여하면서 도시 환경 개선을 위해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초기의 도시개선운동(Civic Improvement)은 마을단위의 마을개선운동(Village Improvement)에서 시작되었다. 1853년 메사추세츠(Massachusetts)주 스톡브릿지(StockBridge)시 마을 미화단체인 로렐 힐 협회(Laurel Hill Association)는 조경계획가 다우닝(Andrew Jackson Downing, 1815-1852)의 저작에서 영향을 받아 도시개선에 착수한다. 도로정비, 가로수 식재, 묘지․공원 정비, 가로등 설치 등을 통해 마을 환경과 경관을 개선하여, 스톡브릿지를 건축물과 녹음이 우거진 전원휴양마을로 주목받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도시개선운동에는 조경가를 중심으로 건축가, 예술가 등의 전문가로 구성된 미국공원·야외 예술협회(American Park and Outdoor Art Association)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도시환경과 경관 개선의 필요성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조경가 옴스테드 주니어와 케슬러(Larry G. Kessler) 등이 소속된 이 협회는 기존에 주목하지 않았던 공장 쉼터, 어린이 놀이터 등의 야외 공간 환경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도시의 흉물인 거리의 난잡한 광고물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도시경관을 개선하고자 했다.

1900년대 최초로 ‘도시미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곳은 해리스버스(Harrisburg)시이다. 이곳에서 설립된 도시개선연맹(League for Municipal Improvement)은 조경가와 토목기술자에게 도시환경 개선을 의뢰했다. 낭만주의 양식의 공원과 놀이터, 도로포장, 정수시스템 등을 확충하여 도시환경 개선을 시도하였고, 초기 도시미화운동 확산의 기폭제가 되었다.

1904년 미국공원·야외 예술협회는 미국도시협회(American Civic Association)로 통합되었고, 도시 위생문제와 자연보존 등 ‘도시개선’을 통해 ‘환경·생태적 가치’를 향상하고자 하였다.

도시미화의 대표적 사례인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는 조경가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 1822-1903)를 초청하여 부지선정과 박람회장 기본계획을 의뢰하였다. 관람객들은 옴스테드가 설계한 ‘영예의 중정(Court of Honor)’ 주변의 신고전주의 양식 건축경관에서 유럽의 도시를 연상하며, 산업화와 슬럼화로 황폐해져 가고 있는 당시 미국의 도시경관을 계획을 통해 복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관’ 계획을 통한 시각적·경관적 ‘도시미화’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해 준 것이다.

1901년에는 워싱턴 D.C. 수도 이전 100주년을 기념하여 철도역, 공원체계(park system), 몰(mall) 개조 등 수도로서 위엄을 회복시키기 위한 다양한 안건들이 제기되었다. 워싱턴 D.C.계획안은 도시외곽을 둘러싸는 옴스테드식 낭만주의식 공원, 파크웨이가 연계된 공원체계 등이 적용된 최초의 도시적 규모의 도시미화 종합계획(comprehensive plan)이었다.

1905년 이후 도시미화운동은 워싱턴 D.C. 계획의 영향을 받아 도시 전체에 대한 마스터 플랜(masterplan)으로 계획되었다. 이 시기부터 상업자본가의 재정적 지원 아래 계획위원회가 설립되고 조경가 또는 건축가의 컨설팅을 통해 종합계획안을 선보이게 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 시기 약 38개의 도시미화계획보고서가 제안되었다. 1905년 로빈슨과 옴스테드 주니어(Frederick Law Olmsted Jr., 1870-1957)의 협업으로 작성된 디트로이트(Detroit) 도시미화계획에서는 사유지 개발 규제가 최초로 언급되며, 시당국 주도의 도시관리 및 계획의 필요성을 알렸다.

또한 조경가 존 옴스테드(John Charles Olmsted, 1852-1920)에 의해 작성된 시애틀(Seattle) 도시미화계획에는 현대 생활권 공원 규모의 놀이터 계획을 포함되어 있다. 도시개선운동과 해리스버그에서부터 조성된 놀이터는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공간과 어른들을 위한 휴식및 레크리에이션 시설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거지역 인근에 많이 계획되었다. 그리고 점차 사회적 요구가 많아지며 공원체계와 함께 연결되어 계획되는 양상을 보였다.

도시미화운동에서 활동하던 건축가 및 조경가의 도시계획적 특성과 철학은 뉴어바니즘(New Urbanism)의 TND(Traditional Neighborhood Development)와 TOD(Transit Oriented Development) 접근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도시미화운동의 성과는 축소되고 일정 부분 왜곡되어, 부정적인 면이 주로 부각되었다. 도시미화운동은 일반적으로 미적 가치에 치중하여 실용성이 없으며, 도시 거주민들이 겪고 있는 본질적인 도시 문제를 도외시한 계획으로 비판받아왔다.

도시미화운동의 부정적 인식 배경에는, 20세기 이후 도시계획의 주류 패러다임으로 등장한 도시실용주의·기능주의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도시기능주의자들은 과학적 데이터 분석과 효율적 관리에 기반을 둔 합리적 종합계획으로서의 도시계획을 추구하였다. 이에 낭만적인 아름다움보다 사회적·경제적 효용성이 높은 도시계획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이전의 패러다임인 도시미화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평가절하를 시도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환경 개선을 통한 ‘도시미화’는 도시계획 속에 살아남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히려 최근 들어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서울의 경우만 보아도 오세훈 시장의 “디자인 서울”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서 도시미화운동을 엿볼 수 있다. 도시미화를 통해 도시성장 혹은 도시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논리이고, 경제논리 및 도시 경쟁시대에 들어서며 그 영향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2010년대부터 도시의 주요 화두인 ‘도시재생’ 및 ‘농어촌사업’ 또한 마찬가지다.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여 지역을 재생하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예산의 많은 부분이 도로, 건축물, 랜드마크와 벽화, 화단, 시설물 개선 등 도시의 물리적 미관 개선에 투입되고 있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도시미화란 용어가 대두된 후 20세기 내내 도시미화운동은 도시를 보다 개선하고자 하는 물리적 계획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도시미화운동의 전개 이후 현재까지 도시 및 오픈스페이스 계획에서 ‘도시미’ 증대를 통해 도시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목표가 소거된 적이 없다. 오히려 현대로 오면서 특히 조경분야는 그 기능과 디자인적 가치가 중시되며, 미적 가치를 높여주는 공간·시설로 더욱 각광받고 있다.

19세기 조경가들은 미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환경오염,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한 복잡하고 삭막한 공간 등의 문제를 도시미화운동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기능과 용도 중심의 도시계획시대에 들어서며, 도시미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경가의 역할과 활동은 축소되고 잊혀져왔다.

현재의 조경가는 ‘공원녹지’ 및 ‘환경생태’ 전문가일 뿐 아니라, 기후와 환경 변화, 고령화, 불평등, 인구감소 등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통합적 도시계획가로서의 역할도 중시되고 있다. 200년이란 시간을 넘어, 도시미화운동의 선두에 서서 도시혁신을 이끌었던 그 시대의 조경가들의 활동과 사회적 사명을 떠올려본다.

[한국조경신문]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