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전 이맘때 늦은 밤, 거리를 지나며 이런 생각을 했다. ‘가로수는 어떤 기분일까?’ 다음 날 태양을 향해 우뚝 선 나무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무가 잘 사는 것은 해를 우러르기 때문 일거야.’ 그리고 얼마 후 보도블럭 사이에 촘촘하게 피어난 작은 꽃을 보고는 이런 느낌이 들었다. ‘풀들은 대단 하구나. 저 작은 틈에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이런 감탄과 궁금증이 겹쳐져 식물에 관한 책을 한 권 쓰고 싶어졌다. 어디서나 씩씩하게 살고 있는 그들에게 한 수 배우고 싶었다. 처음 생각은 단순했다. 종교를 가지고 있던 나는 식물 또한 하늘(신적인 존재)을 우러르고 순종하고 겸양하기 때문에 잘 살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식물을 공부하면서 ‘그게 다가 아니구나.’ 했다.

그들은 순응하고 자족했지만 자신을 지킬 강한 힘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을 비롯한 많은 동물들이 그들을 해칠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재주가 있었다. 그들의 삶은 치열했다. 밟히고 뜯기고 꺾이고 갉아 먹히고 뽑혀도 어떻게든 살아냈다. 질기고 강한 면모 속에는 지략과 술수도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원래 내가 쓰려던 책은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착하고 순진한 모습을 주로 담으려고 했었다. ‘혼란스러운데? 여기서 접어야 하나?’ 망설여졌다. 두 가지 면모 중 하나를 버리고 쓸 수는 없었다. 결국은 솔직하게 식물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담았다. 어차피 생명이란 게 복잡다단한 게 아닌가! 우리 인간 또한 사느라고 별별 꼴을 다보고 별 짓을 다하지 않는가?

그래도 식물은 자신의 생을 영위하느라고 남들을 챙긴다. 씨앗을 만들기 위해 곤충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 내고 씨앗을 내보내기 위해 동물들이 탐낼 만한 것을 장만한다. “이리 와서 나 좀 도와주지 않을래?”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할 필요가 없다. 그러지 않아도 다들 팔 걷어 부치고 달려와서 식물을 위해 일한다. 식물이 늘 ‘선결제’ 방식을 쓰기 때문이다.

식물은 느긋하게 거래한다. 상대가 부도를 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상대가 신용 좀 안 지켰다 해도 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식물에게는 모든 것이 풍부하고 모든 것이 넘친다. 식물의 거래 상대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이다. 영악한 인간도 포함된다. 그런데 식물은 알고 보면 ‘슈퍼갑’이다. 무슨 일이 잘 되었느니 안 되었느니 안달을 낼 이유가 하나도 없다.

모든 게 풍족하다보니 버리는 걸 아까와 하지도 않는다. 식물은 언제나 버리고 내보낸다. 산소도 물도 양분도 잎도 꽃도 열매도 씨앗도 저장하느라 끙끙댈 필요가 없다. 창고유지비가 필요 없다. 원할 때 쓰고 원할 때 버린다. 무엇이든 만들고 어떻게든 변신하고 유일한 생이 아닌 반복적 삶을 사는데, 아끼고 벌벌 떨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줄기와 뿌리에 많은 상처들을 지니고 있어도 끄떡없다. 곤충과 동물과 인간들이 그들을 찾아와 챙길 걸 챙겨가고, 이유 없이 공격해서 흠집을 내서 아픔을 당해도, 그러고는 어느 날 설명도 없이 버림받아도 식물에겐 그게 일상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왜? 식물은 지구상 최강자이고 지구의 진정한 주인이니까. 지존의 자리에 있는 식물이 무엇이 섭섭하고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아픈가? 그들은 만사가 똑같다.

내가 왜 16년에 걸쳐 ‘식물처럼 살기’를 썼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부족한 것, 결핍된 것을 추구한다. ‘아, 그렇구나. 나는 전혀 식물처럼 살지 못하였구나!’ 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런 이유로 식물처럼 ‘온전하게’ 살고픈 나의 바람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식물처럼’ 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살고 싶어 안달을 한다. 언제쯤 그런 날이 올까 애태워 기다린다.

* 지난 3년 반 동안 식물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최문형의 식물노마드'는 필자의 개인 사정으로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중단합니다. 그동안의 집필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편집자주>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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