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재와 보은산방

강진군은 1417년 도강현과 탐진현을 합쳐 강진현이 되었고 1896년 행정제도 개편으로 강진군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진은 다산 정약용의 세 번째 유배지로 18년간 머문 고을이다. 다산은 ‘강진에 대한 대답’에서 강진을 살기 좋은 곳이라 했다. 지인들은 “강진은 죄인을 유배 보내는 외진 곳인데 어떻게 살 수 있는가?” 하며 슬퍼했다. 다산은 ‘겨울이 따뜻하여 귤과 유자를 생산할 수 있고 땅이 얼지 않으며 여름은 서늘한 기운이 높아 살기 좋은 고장’이라 했다.

1801년 10월 다산은 큰형님 사위 황사영의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두 번째 유배지 장기에서 한양으로 압송된다. 그리고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국문을 받은 후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음력 11월 23일 매서운 한겨울에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쉽사리 거처를 마련하지 못했다. 죄인이 유배되면 보수주인이 지정되고 거처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천주교도로 낙인찍혀 천 리 길을 귀양 온 다산을 현감 이안묵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안묵은 노론의 행동대장을 하던 인물로 다산을 죽이고자 했다. 어렵사리 읍성 동문 근처 주막(매반가)의 골방 하나를 얻어 거처를 마련한 다산은 이곳에서 4년간 생활하게 된다. 다산을 받아준 주모는 숙식은 물론 삶에 대한 용기를 주었다. 주모의 도움에 용기를 낸 다산은 거처를 사의재라 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이때 받아준 제자 중 한 사람이 황상이다. 황상은 평생토록 다산의 제자가 되어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다산의 큰아들 학연, 추사 김정희와 교류한 인물이다.

사의재는 강진군에서 2009년에 복원하였다. 방 두 칸과 부엌 그리고 별채, 정자 등이 당시의 주막 풍경을 보여준다. 집 주변은 채소밭과 연못으로 정원이 조성되어 찾아오는 사람을 반겨준다. 사립문을 들어서면 사의재가 전면에서 맞아주고 마루에 조용히 앉아 있으면 다산의 귀양 생활이 느껴진다. 사의재(四宜齋)는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란 의미다.

“생각은 담백해야 하고 담백하지 않으면 빨리 맑게 해야 하고, 외모는 장엄해야 하며 장엄하지 않으면 빨리 단정히 해야 하고, 말은 적어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빨리 그쳐야 하고, 움직임은 무거워야 하고 무겁지 않음이 있으면 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 다산의 ‘사의재기(四宜齋記)’ 중에서

사의재 ⓒ강진군
사의재 ⓒ강진군

강진의 진산은 보은산이다. 보은산은 밥상 위 젓가락처럼 두 줄기 산 능선이 북에서 남으로 십 리를 내려오며 두 능선 가운데 계곡 중간 지점에 고성사(고성암)가 자리한다. 고성사는 해남 두륜산에 있는 대흥사의 말사로 고려시대 원묘국사 요세(了世)가 인근에 백련사를 중창하며 함께 지은 사찰이다.

1805년 4월 사의재에 거처하던 다산은 백련사에서 10살 아래 혜장스님을 처음 만났다. 혜장은 다산의 학문과 인품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두 달 후 혜장은 다산에게 시끄러운 주막의 골방을 떠나 보은산 자락의 고성사 산방으로 옮길 것을 청했다. 혜장의 도움으로 새로운 거처를 정한 다산은 10월 초 강진에 와 있던 장남 학연과 보은산방으로 이사했다. 다산은 산사의 풍경소리를 벗 삼아 밤낮으로 학문에 매진하며 큰아들을 가르쳤다.

한편으로는 사의재 제자인 황상에게 주역을 강론해 주었다. 전국의 산하를 유람하며 정원 가꾸기를 좋아했던 다산이지만 이 시기 정원에 대한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귀양 생활이 궁핍했고 여건이 허락하지 않은 탓이다. 다만 유인(幽人)의 거처에 대한 황상의 질문에 답한 ‘황상유인첩’이 있다. 이 글은 유인이 초야에 묻혀 살고자 할 때 집의 방향과 정원 조성 방법, 농사지을 땅을 어디에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다산의 정원에 대한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담장 안에 갖가지 화분을 놓되, 석류 · 치자 · 백목련 같은 것들을 각각 품격을 갖추되, 국화를 가장 많이 갖추어 되도록 48종류의 구색이 갖추어져야만 비로소 겨우 갖춰졌다고 할 것이다. 뜰 오른편에 조그마한 못을 파되, 크기는 사방이 수십 보 정도로 하고, 못에는 연(蓮) 수십 포기를 심고 붕어를 기르며, 별도로 대나무를 쪼개 홈통을 만들어 산골짜기의 물을 끌어다가 못으로 대고, 넘치는 물은 담장 구멍으로 남새밭에 흘러 들어가게 한다.” - 다산의 ‘황상유인첩(黃裳幽人帖)에 제함’ 중에서

강진의 풍수 형국은 황소가 누워있는 와우형국(臥牛形局)이다. 그래서 강진의 곳곳에는 소와 관련된 지명이 넘쳐난다. 보은산 정상은 우두봉(牛頭峰)으로 소의 머리가 되고 산 중턱 고성사는 소의 목에 달린 워낭이 된다. 읍성 동편과 서편에 각각 자리하는 우물은 소의 눈(目)이 되며 강진만 한가운데 자리한 섬은 멍에가 되어 가우도(駕牛島)라 부른다. 보은산방은 고성사 대웅전 동편에 위치한다. 현재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정갈하게 복원되어 있다. 보은산방 마당에 서면 처마 밑 풍경소리가 워낭소리처럼 들려오고 해풍은 비릿한 바다 내음을 전해 준다.

늦가을 오는 사람 반기는 이 하나 없는 고즈넉한 산사는 조용하기만 하다. 어쩌다 까마귀가 반겨줄 뿐 인기척을 찾기 어렵다. 고성사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가히 일품이다. 대웅전 앞마당은 다산의 고향에 있는 수종사의 앞마당과 유사하다. 다산은 이곳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두물머리 고향을 그리워했다. 이곳의 허리춤 높이 나지막한 담장은 기와로 예쁘게 장식되어 우리네 담장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다산은 보은산방에서 9개월간 생활하고 사의재로 내려왔다. 고요한 산사에 머물다 주막의 골방에서 다시 생활하니 번잡하고 답답했다. 때마침 제자 이학래가 자기의 집으로 옮길 것을 요청하여 그에 따랐다. 제자의 사랑채인 묵재(墨齋)에 들어온 다산은 1년 8개월 동안 머물렀다. 다산은 사랑채 밖 남새밭의 반을 떼 내어 대나무를 심었다. “천지가 대나무인데 무얼 하려는가?” 하며 남들이 수군거려도 개의치 않았다. 울타리가 되도록 물 주고, 북을 주며 손수 가꾸었다. 부친을 따라 화순에 있을 때 즐겨 오르던 차군정(此君亭)을 회상하며 정원을 가꾸고 싶은 욕망을 대신한 것이다. 차군(此君)은 대나무의 별칭이다.

다산초당 정원

다산초당은 원래 다산의 먼 친척인 윤단 소유의 별장(산정, 별서)으로 만덕산 자락에 위치한다. 만덕산은 예로부터 차나무가 많아 다산(茶山)이라 했고 정약용은 이를 취하여 호(號)로 삼았다. 다산은 초당으로 옮겨 오기 전 인근에 있는 백련사를 유람하며 혜장을 만나고 윤단의 별장을 구경하였다. 1808년 3월에는 윤단과 그의 산정에서 10여 일을 함께 머물렀다. 다산은 마음속으로 이곳에 들어오고 싶었다. 윤단이 학문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고 경치가 수려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제자로 있던 윤단의 아들이 부친의 별장에 거처할 것을 요청했다. 다산은 소원대로 만덕산 산정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산정을 다산초당이라 하고 유배에서 풀려나기까지 10년이란 세월을 보내며 500 여 권의 저술 활동을 했다.

다산초당
다산초당

다산은 이사 온 다음 해 봄부터 초당의 정원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먼저 채소밭은 경사가 심한 초당 아래쪽에 조성하였다. 예전에 읽었던 치산치수에 관한 책을 기억하여 돌을 죽 세워 계단과 난간을 만들고 흙을 채워 평평하게 하였다. 때가 농사철이라 마을 장정의 도움은 받을 수 없어 윤단의 아들 규로 형제와 어린아이의 도움을 받았다. 다산은 삼태기와 삽을 손수 챙겨 들고 채소밭을 조성하였다. 작업 중에는 윤규로 동생이 손을 다치기도 했다. 다산은 채소밭 조성을 마무리하고 조촐한 자축연을 열었다. 아홉 계단 채소밭 조성이 마무리되자 씨를 뿌렸다. 무와 부추, 쑥갓, 파, 가지, 해바라기, 겨자, 상추, 토란을 심고 저절로 나는 명아주와 고사리, 쑥은 나물로 먹거나 약재로 이용하였다. 채소밭 주변은 띠를 엮어 노루가 못 뜯어 먹게 하고 말이 채소밭을 망칠세라 울타리를 둘렀다.

채소밭 조성이 마무리되고 이번에는 연못을 새롭게 조성했다. 초당 동편에 있는 연못이 좁고 작아 이를 넓히어 산 밑까지 확대하고 기존의 떡갈나무와 싸리나무를 제거하고 단풍나무와 느릅나무는 정원용으로 남겨두었다. 또 바위를 굴려 산에 기대어 계단식으로 화계를 조성하고 연못 위에서 흘러온 샘물을 비구(飛溝, 홈통)를 통해 장군(배가 불룩하고 목 좁은 아가리가 있는 질그릇)으로 떨어지고 이어서 연못으로 흘러들게 연결하였다. 작업 중에 백련사 스님이 연못 풍경을 보고 감탄하며 동자승을 통해 연뿌리를 보내와 이를 심고 물고기를 풀어 놓았다.

연못 조성이 끝나가자 다산은 초당에 수목을 추가로 심었다. 담이 터진 곳에 차폐용으로 대나무를 심고 초당 양 언덕에는 수양버들이 자리하여 초당을 가리게 했다. 또 주변에는 당귀와 작약, 배롱나무를 심고, 국화, 모란의 묵은 뿌리는 쪼개어 나누어 심었다. 감탕나무 늘어진 가지는 휘어 잡아매고 석가산 옆에 유초(乳蕉, 파초)를 심고 정원을 완성하였다.

다산사경. (시계방향으로)정석(丁石)·약천(藥泉)·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다조(茶竈)
다산사경. (시계방향으로)정석(丁石)·약천(藥泉)·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다조(茶竈)

마지막으로 바닷가에서 비비 꼬여 소라와 고동 같고 개와 사자의 형상을 한 괴석을 주워다 연못의 북쪽에 석가산을 조성하였다. 석가산은 전통 정원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정원 양식으로 신선이 사는 봉래, 방장, 영주를 표현하고 신선같이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다산의 인생길

다산의 인생길. 유년기, 사환기, 유배기, 노년기
유년기, 사환기, 유배기, 노년기를 뜻하는 다산의 인생길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은 역동적이다. 시인 정호승은 ‘뿌리의 길’이라 했다. 필자는 이 길을 ‘다산의 인생길’이라 칭한다. 다산의 인생은 크게 4번 바뀌는데 이 산길 역시 4번의 변화가 있다. 다산의 일생을 보여주는 길이다. 유년기 – 사환기 – 유배기 - 노년기의 삶을 표현한다. 마을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길은 평탄한 오솔길이다. 다산이 과거에 합격하기 전까지 유년기의 평온한 삶을 보여준다. 다음은 나무뿌리가 갈비뼈처럼 노출된 뿌리의 길이다. 다산이 과거에 합격하고 정조와 함께한 시기로 정적들의 시샘과 견제와 싸우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다산의 몸부림이 느껴지는 사환기의 모습이다. 세 번째 길은 18년의 유배의 길이다. 유리 조각이 세워진 형태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운 돌밭 길로 귀양살이의 곤궁함을 보여준다. 다음은 노년의 인생 마무리 길이다.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길은 다산초당까지 이어지며 노년기의 삶을 표현하고 이상향 즉 다산초당으로 들어서는 길이다. 다산초당 오르는 길은 신비할 정도로 정약용의 인생을 보여 준다.

다산초당은 우리 정원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곳으로 사대부 별서정원이다. 다산이 남긴 초당 관련 문헌은 정원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다산은 정조와 함께 정원에 대한 자료를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이다. 또 직접 자신의 정원을 조성한 가드너다. 다산초당은 그런 다산에게 있어 이상향의 세계이며 신선이 사는 동천(洞天)이 된다. 필자는 우리의 전통 정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강진의 다산 유배지를 반드시 찾아보길 권한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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