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청명과 곡우 사이의 원림에서 3시간을 거닐다

봄이 꽤나 지나 여름을 향하고 있다. 지난 5월5일 어린이날이 여름의 시작이라는 입하(立夏)였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봄 계절을 좀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청명과 곡우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전개되는 봄 이야기이다(2022.4.15.). 초고를 쓴 시점과 이 글의 발표 즈음은 한 달여 차이가 난다. 한 달 전의 ‘계절의 풍광’을 다시 새기자는 속셈이다.

한 달 전 숲은 연두로 빈틈없이 메워졌다. 처음에는 ‘조원동 원림’의 웅크리고 앉아 되돌아보는 정자인 ‘이고정(跠顧亭)’ 아래 언덕길에서 생강나무 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도시는 곡우(穀雨) 즈음에 이미 매화, 생강나무, 산수유, 개나리, 백목련이 한꺼번에 피어났다. 인공의 도시가 꽃 피고 뽐내는 동안 산중 원림의 개화 소식은 꼼짝없이 요지부동이었다. 도시의 인공 식재지와 달리 산중 원림의 꽃은 여전히 피는 순서가 있고 체계와 계통을 지킨다.

임천(林泉)이라고도 불리는 산중 원림에서는 그저 생강나무 노란꽃으로 들뜰 뿐이었다. 그러다가 올괴불나무, 물오리나무, 진달래꽃을 만난다. 그러면서 산벚나무 꽃을 순순하게 접한다. 국수나무 새순이 터지고 참나무류, 진달래, 개암나무, 산벚나무의 새 잎새가 들쭉날쭉 올라온다. 호수 건너서 바라보는 산중 원림의 색감은 연두부터 초록에 이르는 몇 가지 마법의 산뜻한 정서로 가득하다. 지난 겨울 원림이 얼마나 허전하였으면 달리는 고라니가 보였던 장면이 떠오르겠는가. 생명력 충만한 원림은 즐거운 풍광으로 그윽하다. 3시간을 거닐어도 절로 미소짓게 하고 신명나게 한다.

 

‘풍경의 살맛’이라는 의경(意境)

이 계절의 아름다운 풍경을 「풍경의 살맛」이라 부르자.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나 의욕이 ‘살맛’인데, 이를 풍경에 대입시켜 의경(意境)을 지니게 한 것이다. 풍경이 ‘살맛’을 만날 때, 사람의 심상에 올바름 스민 ‘정의로움’이 착상한다. 그래서 이 계절의 아우성은 프랑스 대혁명보다 더 민주적이며 감동의 밀도를 지닌 사일구 혁명을 잉태하였다. "초등학생은 형과 누나를, 할머니는 내 새끼들을, 교수단은 내 학생을" 건들지 말라고 들고 일어났다. 마치 금수강산의 아름다움을 빼닮았다. 진달래 붉게 물든 산천의 풍경과 심상이 만나 이루어낸 정서의 극강이며, 생명에서 초월을, 직관에 따른 돈오(頓悟)를,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아가는 의경의 경지에 든 것이다.

이렇듯 청명과 곡우 사이의 원림 풍광은 사람에게 의연한 심상을 듬뿍듬뿍 넘치도록 채운다. 임천의 율려가 생명의 율동이 되어 산벚나무 꽃잎 분분하게 휘날린다. 산화는 물이 한곳으로 흐르듯 노도처럼 밀려든다. 보이는 것은 풍경으로 맺히지만 뜻을 얻는 득의(得意)는 풍경 밖에서 찾는다. 풍경의 ‘살맛’은 변증법적으로 새로운 내재적 질서를 형성하는 관념의 흐름이다. 산중 원림에서 산벚나무 꽃 분분하게 흩날리며 얻은 득의를 풍경 밖에서 노래한다.

 

산벚꽃 날리며 – 임천한흥.179 / 온형근

내원재 오르는데 산벚꽃 분분하다.
잎과 꽃이 잠깐 만났다가
꽃잎 흐트러지면서 산화
낱개로 누운 당당한 시선

탱탱하여 활짝 열린 진달래꽃
삭느라 몸 오그라지는 처연함 즈음에
산벚꽃 싱싱한 꽃잎 포개고,
가지 뻗어 오솔길에 떨어진 꽃잎
아침 햇살 등진 그림자를 사열하듯
길 양쪽으로 도열

탁탁 탁타닥 탁탁타닥 청딱따구리
쉴 새 없이 곡기 끊은 아까시나무를
중간에서 다시 중간 높이의 줄기를
후벼파는 혼절의 안부는 흩날림일까
산벚꽃 낙하지점의 인도였을까

막 피어나 만개에 이른 조팝나무 위로
한 그루 장성한 산벚나무 꽃잎 우수수
분홍 알갱이로 살포시 드리운다.

-2022.4.17.

 

곡우 하루 전, ‘열린원림문화’를 향유하면서 창작한 「산벚꽃 날리며 – 임천한흥.179」라는 제목의 시이다. 2021년 4월부터 시작한 원림에서의 시창작이 이윽고 한 해를 넘기고 새로운 발자취를 긋고 있다. 산행 출근으로 일상을 시작하다가 우아한 ‘열림원림문화’ 향유에 이른다. 기품 있는 산책을 낮게 읊조리며 천천히 걷는 ‘미음완보’로 거듭한다. 꽃 피고 날리며 겨울 가지에서 잎눈 터져 연두로 솟고 숙이는 들쭉날쭉 온전한 임천이다. 이때의 일렁이고 출렁이는 미적 체험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아름다운 심상을 내재율로 심아 문화유전자로 전승된다. 청명과 곡우 사이의 원림 풍광은 이렇듯 질량을 잴 수 없는 찬란한 아름다움이고 등급을 매길 수 없는 격조이다.

 

원림은 얽매임과 거리낌을 버리는 자연 풍광

고산 윤선도의 원림은 자연의 풍광을 극대화하는 세밀한 관찰과 체험에서 비롯된다. 금쇄동 원림(수정동, 문소동을 포함하여), 보길도 원림, 양주 고산 원림이 모두 그러하다. 고산의 원림조영 의지는 일상에서의 구속됨과 구애받음의 현실을 넘어서는 정신적 지향으로서의 ‘기구(棄拘)’로 귀결된다. 기구는 무엇에 얽매이거나 거리낌을 버린다는 말이다. 가는 곳마다 원림조영에 생애를 거는 단 한 줄의 설계 언어가 ‘얽매임과 거리낌을 버리는 일’에 있다. 이를 <금쇄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

 

점로에서 서쪽으로 문소천(聞簫川)을 건너 백 보쯤 가면 벌써 오르막길이 되어(......) 석문(石門)에 이르는데, 그 모양이 매우 괴이한 데다가 큰 바윗돌이 공중에 가로걸려 있어서(......) 이 석문을(......)불차(不差)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이 문으로 들어가서(......) 석대(石臺)가 나오는데, 허리와 다리를 휴식하기에 적당하기 때문에 이 석대를 하휴(下休)라고 명명하였다.

또 남쪽으로 꺾어서 오십 보쯤 가다 보면 층암(層巖)이 평탄한 데다가 벼랑의 바윗돌이 지붕처럼 위를 덮어 주어(......) 기구대(棄拘臺)라고 명명하였다. 이곳에 오르면 온 길도 알지 못하고 갈 길도 보이지 않는데, 자신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 사방을 돌아다보면 어느새 풍진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다.

-<고산유고> 제5권 하, <금쇄동기>, 한국고전종합DB

 

금쇄동 원림에 22개의 이름을 지었는데, 처음이 불차(不差)라는 큰 바위이다. 천지만물에 차별을 두지 않겠다는 고산의 인문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다음에 하휴(下休)라는 석대, 하휴를 조금 지나 기구대(棄拘臺)가 나온다. 기구대에 오르면 온 길도 알지 못하고 갈 길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 사방을 돌아다보면 어느새 풍진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원림의 입구인 ‘기구대’에서 이미 외부의 구속과 내부의 구애받음을 송두리째 버린다. 그러니 고산에게 ‘기구’는 작정의지(作庭意志)이자 원림조영의 실천 덕목이다.

 

조원동 원림의 '토묘대'(2022.01.23., 사진좌측)와 조원동 원림의 '민물가마우지'(2022.03.07)
조원동 원림의 '토묘대'(2022.01.23., 사진좌측)와 조원동 원림의 '민물가마우지'(2022.03.07)

 

 

‘조원동 원림’의 토끼 귀처럼 호수로 튀어나온 토묘대(兎卯臺)에서 산줄기 아래 호수 쪽 ‘튜브보’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사귄 민물가마우지가 날개를 펴고 털거나 말리는 풍경을 보기 위함이다. 요즘 부쩍 민물가마우지 먹이 활동 모습에 빠졌다.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호수를 종횡무진 편대를 이루어 하강과 상승을 누리면서 마음껏 활보하는 모습은 백미의 볼거리이다. 얽매이지 않고 거리낌이 없다. 원림의 풍광은 계절마다 절기마다 수시로 변화무궁한 발굴이고 세밀한 발견이며 정교한 탐색의 연속이다.

 

새로운 것은 없다. 원림을 어떻게 끌어안느냐가 있을 뿐

‘열린원림문화’ 공간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시공간을 함께하는 ‘문화경관’ 유산이다. 문화경관은 세계유산(World Heritage) 종류의 하나인 문화유산에 속하며 인간과 자연의 교류 공간에 대한 개념으로 정의하고, 인위적 조성 경관, 유기적 진화 경관, 주변 결합 경관의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따라서 원림은 자연과 인간 활동의 교류를 뚜렷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 문화경관 유산이다.

‘한국정원문화’ 조성 기술에 대하여 구제적으로 적시된 기법 서적은 따로 없다. 다만 원림을 향유하고 음풍농월하는 문학적 기록으로 원림조영의 관점을 잘 살펴볼 수 있다. <금쇄동기>, <보길도지>나 이외에 <만휴당 16영>, <비해당48영>, <소쇄원48영>처럼 기문이나 시문을 통해 원림의 영역성과 진경을 묘사하고 인공과 자연 경물의 상징적 명칭을 부여해 이상향에 이르고자 했던 원림조영의식은 원야나 작정기처럼 동일화된 작정(作庭)방법론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이나 개인의 흥취에 따라 무한한 가변성을 지닌 원림조영을 지향하였다.

시와 문장과 그림으로 공간과 장소에 심미의식을 반영하여 원림을 조영하고 경영한 것을 탐색할 수 있다. 당대의 경관적 흥취를 기록한 시서화는 전통조경의 새로운 해석 가능성과 무한한 문화원형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자원이다. 원림조영은 작정자의 심미의식으로 공간과 장소성 또는 경물을 통하여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원림 풍광을 세밀하고 정밀한 설계 언어로 보다 구체화시키고 공유하여 풍요로운 범주로 수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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