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 Times] 우리나라에 분재열풍이 불었던 시기가 있다. 1970~1980년대이다. 사무실이든 집이든 고색창연한 소나무 분재 하나 정도는 들여놓아야 품위있다고 여겼던 시절이다. 바위와 이끼를 품고 꿋꿋하게 자라나는 노송을 실내에 모셔놓고 나무처럼 자연처럼 살려했던 사람들의 소망이 있었다.

지금은 직접 자연으로 나가서 나무와 돌과 풀 사이에 하루 이틀 둥지를 틀어버리는 캠핑이 유행하고 보니, 분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해도 이전 같지는 않다. 자연에 두면 맘껏 뿌리를 뻗고 가지를 키울 나무들을 아담하고 예쁜 화분에 모셔두고 키우는 사람의 취향과 마음에 맞추어 물주고 거름 주고 다듬고 하며 동거하는 것이 분재이다.

화분에 심긴 나무는 현대를 사는 인간과도 같다. 본래 인간은 야생의 동물들처럼 산 속에서 동굴에서 강가에서 거칠 것 없이 살았다. 해 뜨면 일어나고 어두우면 눕고 배고프면 먹고 먹을 게 없으면 굶었다. 그러다가 육체의 한계에 도달하면 자연스레 자연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우리는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자연 속에서 자족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소똥으로 집을 짓고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냉장고 하나 없이 금고나 전기시설 없이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의 얼굴은 순박하고 표정은 걱정 하나 없다.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들의 삶도 비슷하다. 키우는 염소가 먹을 풀이 없어지면 그들은 아무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난다. 살림도 단출하다.

요즘 인기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들도 비슷하게 산다. 그들은 아주 약간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만 현대 도시인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무욕의 일상을 산다. 자연 속의 사람들의 공통점이라면 ‘스트레스 제로’일 것이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이라서, 암이나 불치병을 자연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도 생겼다.

자연 속에 산다는 건 숲에서 자라는 나무의 삶을 사는 것이다. 숲의 나무는 햇빛과 비만 있으면 족하다. 햇빛으로 광합성을 하고 비를 통해 양분과 수분을 흡수한다. 땅은 그들에게 생모처럼 푸근한 사랑과 자원을 준다. 땅에 심겨진 나무에게 바랄 것이 더 있겠는가! 그들은 한 번의 생을 즐기며 산다.

분에 심겨져 보호와 돌봄을 받으며 오랫동안 자란 나무.
분에 심겨져 보호와 돌봄을 받으며 오랫동안 자란 나무.

땅과 물과 햇빛과 각종 동물들이 문제를 해결해 준다. 바람이 세다고 걱정할 나무가 있을까? 거센 바람도 서로 어울려 든든히 막아선다. 방어막이 뚫린들 어떠랴? 가지가 몇 개 부러져도 큰 문제없다. 태풍에 아예 쓰러져 버린다면? 내가 죽으면 자식들에게 많은 햇빛이 선물로 돌아갈 것이고, 나를 그루터기로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가니 죽음도 헛되지 않다.

땅에 심겨진, 숲의 나무는 유유자적하다. 그런데 분에 심겨진 나무는 어떨까? 때맞추어 분갈이가 필요하고 거름이 있어야 하고 해충을 잡아주어야 하고 바람과 물과 햇빛의 조화 또한 인위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현대사회 시스템 속의 인간과 같다. 때맞추어 학교에 가고 시기가 되면 취직을 하고 퇴직을 하는 일생이다.

일생의 사이클이 도는 동안 부모가 가족이 사회가 사랑 또는 복지의 이름으로 그를 돌본다. 잎을 생산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동안 세심한 보살핌이 따른다. 그러다가 모든 임무를 다하고 나면 생명을 마친다. 숲의 나무는 자유롭게 살아가지만 분의 나무는 정형화되어 산다. 자력이 아닌 타력에 의지해서. 분에 심긴 나무인 우리는 그래서 산과 숲에 간다. 잠깐이라도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싶어서.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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