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시대] 옛 정원에 담긴, 시대와 인물의 욕망도 정원의 역사다
[조경시대] 옛 정원에 담긴, 시대와 인물의 욕망도 정원의 역사다
  • 이태겸 (주)에스이디자인그룹 공공디자인연구소 소장
  • 승인 2022.04.20
  • 호수 6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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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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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표적인 정원가인 윤선도가 보길도에 정원을 만든 때는 그의 나이 51세인 1637년이었다. 그 이후로 40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산과 강도 변했고, 교통과 기술, 산업 등 전 분야에서 사회는 격변했다. 조선시대의 사회제도와 생활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땅 속에 묻힌 초석 파편만 남아 그 시절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옛 정원도 마찬가지다. 외부공간에 자연물을 이용해 만들어진 정원은 전쟁, 도시개발 등으로 인해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땅속의 흔적들만 남은 보길도의 부용동 정원을, 현대에 와서 전통정원이란 이름으로 복원하고 연구하기 시작한지도 그리 오래지 않았다.

흔적과 단편적인 기록에 의지해 옛 정원을 탐구하는 것은 고단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많은 선학들이 옛 시대 정원유적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주로 학문·사상적 배경을 정원 원리와 연계하여 탐구하였으며, 선비문화와 도교사상에 근거한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옛 정원은 현실의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한 이상향이라는 것이 주된 해석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토지제도 및 생활방식은 현재와 차이가 크다. 조선시대는 현대와 비교하면 가용자원이 한정되어 있었고, 미개발지가 많아 이용할 수 있는 공간도 훨씬 적은 편이었다. 그 시대인들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연과 주어진 환경에 맞서 더욱더 도전적인 생활방식을 취해야 했을 것이다. 결국, 정원이라는 공간 또한 치열했던 조선시대인들의 삶과 생활에서 유리된 공간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옛 정원을 연구할 때, 정원이 조성된 시기의 토지제도, 가용자원의 종류와 가치, 교통수단, 양반가문의 영향력 및 개인의 활동과 같은 사회경제적 배경까지 고려한 정원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전통’ 정원은 여전히 은둔과 감상의 공간, 욕심 없고 청빈한 공간이라는 틀 안에 박제되어 있다.

윤선도가 만든 정원에 대한 연구도 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조선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 해남윤씨가 종손으로서의 윤선도의 사회적 활동 등과 정원 조성과의 관계성은 옛 정원과 먼 이야기로 취급되고 있다.

지금부터는 앞서 말한, 생산과 경제활동의 장이면서 가문의 영역 확보의 수단으로써 옛 정원을 살펴보자. 정원에 숨겨진 인간 윤선도의 욕망을 상상해본다. 그 시대의 사회경제적 체계에서 살아가던 인간으로서 윤선도의 삶의 작동기제는 무엇이며, 정원을 만드는 행위는 이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가장 아름다운 민가 정원으로 꼽히는 보길도의 윤선도 정원을 새롭게 읽어보려 한다.

윤선도는 우리에게 어부사시사의 작가이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든 감각 있는 정원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수리·토목 분야에 뛰어나며, 간척을 통해 가문의 토지를 개간하고 서남해안 일대의 섬을 경영한 사람이라는 것은 생소한 이야기일 것이다. 윤선도는 일찍부터 간척과 해양활동에 적극적이었던 해남윤씨가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가문의 정신과 활동을 계승하여 그 누구보다 활발하게 서남해안을 간척한 개척자였다.

옛 정원 중 별서정원은 산림천택(山林川澤)이라는 개인 소유가 불가능한 국공유지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산림천택의 토지와 자연자원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규제와 통념을 활용하여 지혜를 짜내어 활용해야 했다. 도교의 자연애호 사상을 담은 정원을 만들고, 유교사상과 풍수사상에 기반한 사산국내에 묘를 쓰는 행위는, 이러한 공유공간을 점유하고 관리권을 확보할 수 있는 암묵적으로 용인된 수단이었다.

그런데 윤선도는 이렇게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사회적 통념에서도 벗어나 강력한 행위제한이 있던 금산(禁山), 즉 보길도 내부에 정원을 만들었다. 윤선도는 금산의 관리라는 공적 명분을 내세워 보길도에 입도 후 부용동 원림을 만들었지만, 이는 그 시대의 법률 및 사회통념에도 적합하지 않은 일이었다.

윤선도는 표면적으로는 보길도에 대한 애호(愛好)를, 실질적으로는 섬과 산림자원 관리를 들며 보길도에 정원을 만들었다. 그 일대의 산림 및 특산물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기도 하였다. 나아가 해상이동의 거점이던 보길도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서남해안 일대에서 간척과 해상활동도 하였다.

즉, 윤선도는 보길도와 해남 일대에 정원을 만듦으로써 가문의 영향력을 강화·확대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를 확보한 것이다. 부가적으로 가문의 영역을 확대하고 영향력을 강화하는 등의 사회경제적 가치도 창출할 수 있었다.

정원-정원, 정원-간척지 등의 관계를 광역적으로 살펴보면 서남해안 경영자이자 디벨로퍼로서의 윤선도의 의도가 더욱 잘 드러난다. 금쇄동-수정동-부용동 정원과 간척지 등을 연계하여 정원권역으로 바라보면, 지역을 경영하는 컨트롤타워로써 만들어진 정원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현대인들이 공원을 누릴 때 느끼는 감정과는 별개로, 공원의 조성 목적에는 대규모 도시개발에 의해 만들지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에서 공적 기여 또는 공적 알리바이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현대에 만들어지는 대규모 공원의 조성배경에 대해서는 비판적 관점을 취하기도 하며, 경제나 정치 논리가 배제된 착한 공간으로만 인식되지 않는다.

지금보다 훨씬 치열한 개척시대였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정원 또한 그 시대 사람들이 욕망이 담긴 공간이다. 옛 정원은 시대인의 삶을 담은 역동적인 문화경관이다. 이제는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자 실천의 장소로써 옛 정원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옛 정원에 담긴, 시대와 인물의 욕망까지도 정원의 역사다.

[한국조경신문]

이태겸  (주)에스이디자인그룹 공공디자인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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