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환 명예교수
조세환 명예교수

우린 감사해야 한다

조경분야에 종사한지 49년이다. 속된 말로 조경밥 반 백년 먹었다. 73년 3월1일에 조경학과 입학했으니 조경밥, 참 많이도 먹었다. 운이 좋았다. 건축가이신 아버님과 형님 권유 덕분에 당시 조경학이라는, 최신의, 따끈따끈한 신학문을 접할 수 있었고 늘 조경계에서 앞서가는 사람으로 혜택을 누려 왔다.

나뿐만이 아니다. 빠르면 20대 후반, 30대의 젊은 나이에도, 서울대 환경대학원 2년 과정의 석사학위로 대학 교수가 되었다. 조경학 만남 덕분에 해외 유학도 떠났다. 기성 학문에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사회적 특혜다. 졸업하면 취업도 거의 100% 되고, 조경기술사 자격증만 따면 기업에 임원이 쉽게 된다. 젊은 나이에 프리미엄에 연봉까지 더해 그 당시 수억 대를 능가하는 고액의 임원으로 채용되었다.

뜻 있는 조경가들은 시공이든 엔지니어링이든 창업해서 쉬이 기업의 사장, 대표이사가 된다. 한국 종합조경공사까지 설립되어 조경분야들 이끌어 갔다. 서울시를 비롯 도로공사, 산업기지개발공사, 한국관광공사, 한국공항공사...등 등 지방정부, 공기업에 요원의 불길처럼 조경조직이 창설됐다. 후일 대부분 고위직에 올랐다. 대학들은 앞 다투어 조경학과를 개설했다. 조경학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격 전공분야로 유명세를 탔고, 인접 타분야의 시샘 속에 맹위를 떨쳤다. 지금은 좀 그렇지만...어쨌던 그렇게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까지, 시공 · 설계 · 엔지니어링 · 감리 등 다양한 섹터에서 조경밥 먹는 사람들의 수가 누적하면 수십만 명에 다다른다. 되돌아보면 우리 조경가들은 감사해야 한다. 조경에 감사해야 한다. 정확하게는 조경의 탄생에 감사해야 한다. 거듭 얘기 하건데, 올해가 한국조경 50년이 되는 해라는데.. 우린 무엇보다 한국조경의 탄생에 먼저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시세말로 조경이 태어나도록 애쓴 한국조경 창설의 주역들, 아버지·어머니 역할을 수행한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오늘날의 한국조경은 그분들 덕분에 태어났다. 그게 한국조경 역사의 뿌리다.

 

B-Day는 Birthday의 이니셜

50년 전인 1972년 4.18일은 한국에 '조경'이란 전공분야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등장하고 논의된 날, 조경 탄생의 날, 바로 한국조경의 생일이 되는 날이다. 한 국가의 대통령(박정희)이 청와대에서 '조경에 대한 세미나' 개최를 주최한 것이다.(그림1 참조) 대박이다. 대통령 비서실 서열 I위인 '경제제1수석비서관실'에서 주관하고, 건설부, 산림청, 문화재관리국 등 정부기관 고위 공무원과 도로공사 등 공기업 고위직이 참여했다.

서울대, 영남대, 홍익대 등 대학에서 도시계획, 원예학, 임학, 건축학, 토목학, 미학 등 내노라 하는 전문분야 교수들이 참여해서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조경의 개념과 범역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했다. 경제제1수석비서관(정소영)이 토론의 좌장을 맡아 발표와 토론을 주도했다.(한국환경조경발전재단 발행, 졸저 《한국조경의 도입과 발전 그리고 비전》 부록 참조)

이 세미나 개최는 곧 이어 대통령 비서실에 '조경담당비서관'을 임명( 1972. 5.10)하기 위한 전초전이었고 또한, 향후 국토개발의 시대 한국에 조경학을 육성시키겠다는 대통령의 전략적 실천의 출발이었다. (여기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졸저 <한국 현대조경 태동의 역사>, 기문당 참조) 대통령 박정희는 왜, 어떻게 조경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또 조경학을 창설하게 되었을까? 우선 그는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열렬한 자연애호가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대통령 재직 중 자연보전과 관련된 일련의 정책·제도들-공원법, 환경보전기본법 등 제정, 개발제한구역 지정, 국립공원 지정, 산림녹화운동 전개 및 산림청 창설, 자연보호헌장 제정 및 자연보호운동 전개, 새마을운동을 통한 마을녹화사업, 자연보호백서 발간 등-을 굵직굵직하게 추진하였다.(그의 사후, 산림녹화와 관련하여 임학계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조각상을 광릉수목원 내에 건립하였다)

좀 더 디테일하게는 대통령기록실에 보관된 대통령 지시 및 이행보고 공문 자료를 보면 조경학 세미나 개최 이전인 1961~1972년 3월까지 그는 자연보호 및 환경보전 관련 지시(수목식재, 꽃, 잔디식재, 경관, 수목보존, 보식 등)가 수시로 이루어 졌고 직접 스케치를 통해 관련 개념을 지시한 것도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정책과 제도에서 또, 구체적 사업 지도에서 보여주듯 그의 몸 속에는 자연애호 관련 DNA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연애호 DNA가 조경학을 창설하는 방향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사회‧환경에 노출되어야 한다. 그 당시 제 1차~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의해 추진된 국가 산업화와 국토개발사업의 추진과, 1971년 여름 재미 조경가 오휘영씨(1972년 5. 10일 조경담당비서관으로 임명돼, 이후 조경학 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됨. 여기에 대해서는 후일 구체적으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임)와의 우연한 만남이 조경학 창설의 배경적 환경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한국조경의 창설은 그가 태생적으로 품고 있던 자연애호 DNA가 이 두 가지 외부적 우연의 사회‧환경을 만나면서 ‘한국조경 창설’이라는 표현형(Phenotype)으로 발현되어 한국조경 시작의 역사를 만들어 내게 된다.

 

우린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그날에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님의 은공을 기리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동시에 상식이다.. 그렇듯이 우리 조경인 또한 오늘의 우리들을 있게 한 한국조경의 B-Day, 그날을 있게 한 한국조경 창설자들의 은공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앞서 얘기한 필자의 졸저에 따르면 조경 창설자들이 그렸던 조경분야의 비전은 실로 담대했다. 단순한 공원의 범주에 머물지 않고 국토와 도시의 공간과 도로 등 각 종 인프라를 대상으로 한 국토경관과 환경을 포괄적으로 계획·설계· 시공 등 건설하는 막강한 분야였다. 이런 비전과 의지가 1973년 10월, 한국조경학회지 창간호에 대통령의 지시 사항으로 안 표지에 잘 실려 있다. “국토를 잘 보전하자! 이 땅은 조상들의 뼈가 묻혀있고 묻혀야 할 땅이며, 우리의 자손만대가 지켜 나가야 할 삶의 보금자리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 1974년 조경분야의 법적 효시가 건설업법에 특수건설업으로 규정해 둔 배경과 이유가 바로 이런 비전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초심이 무엇이었던가를 되돌아보는 것은 미래로 향하기 위한 기준점을 잡는 것이 된다. 그렇듯이 오늘 한국조경 창설의 B-Day는 그날의 담대한 조경 비전을 기억하고, 되돌아보고, 또 기념을 통해 앞날의 비전을 살펴야 하는 날이다. 더구나 반백년이 되는 한국조경 50년의 큰 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은 우리 모두 다 같이 크게 자축하고, 한국조경 창설자들의 앞선 발자취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는 특별한 날이 되었으면 한다. 오늘은 한국조경 창설이 시작된 날, 한국조경의 역사적 기념일 (memorial Day)이다.

필자 약력 : (사)한국조경학회 고문 / (재)환경조경발전재단 고문/ (사)한국조경협회 고문

 

 

 

*[기고]의 내용은 독자 개인 또는 단체의 의견이며,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한국조경신문]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