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림 리부트」란 말을 사용하는 의미

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원림」이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을 지칭하는 학문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은 조원, 한국은 조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열린원림문화' 향유에서의 「원림」은 중국의 원림이 아닌 문화유산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한국정원문화와 조경 유적의 본질을 소환한다. 한국정원문화콘텐츠를 어떻게 파악하고 반갑게 맞아 정성껏 대접하여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런 면에서 ‘임천’이라는 말이 매우 적절하겠으나 이미 '○○○ 원림' 등으로 문화유산 분야에서 호칭되고 있는 상황에 경의를 표하기로 한다.

어떤 집단에서 특정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나 권위를 잃고 결핍 요소를 드러낼 때 「리부트Reboot」란 단어를 불러와 새로운 의미소를 부여한다. 통용의 관습에서 벗어나 또 다른 관점의 동력을 얻고자 할 때 필요하다. 기존의 관행과 이치를 되돌아보고 유지된 것과 잃어버린 의미를 되새김하기 위함이다. 일종의 재가동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사용하는 「원림」은 무엇인가. 임천이라 부르다 여전히 낯설어 도시에서 가까운 산림을 대상으로 지속적 욕망과 간헐적 욕망이 중첩하는 지점에서 의미소를 찾는다. 문화재청에서 지칭하는 원림의 개념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욕망하지만 이는 특정 연구자와 집단에 머무는 현실이어서 사문화에 가깝다는 진단이다. 이를 원림의 외연을 보다 확장하여 실생활에서 생태문명으로 되살릴 수 있도록 살아 생동하는 의미의 간헐적 실행을 제안한다.

문화유산에서 다루는 「원림」의 지속적 개념에 더하여 임천에서 띄엄띄엄 되풀이하여 이어지는 간헐적 생태문명으로서의 「원림 리부트」이다. 원림의 대상과 새로운 관계 설정을 실천하는 변화의 함의를 함축한다. 지금까지 적법하던 단어에 새로운 외연을 받아들이고 원림의 대상이 작동되어온 이치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의지이다.

'열린원림문화' 향유의 핵심은 기회를 즐기는 실천

'열린원림문화'의 향유에 소요되는 시간과 주기와 장소 그리고 반복 되풀이의 정도는 중요한 고려 사항이 아니다. 간헐적 욕망의 향유라고 정의하여도 괜찮다. '열린원림문화'의 핵심은 기회를 즐기느냐의 실천 요소에 향유의 근거가 마련된다. 원림 소요유(逍遙遊)라 이름 붙이는 것도 시작과 마무리까지의 사색과 흥겨움을 본질로 삼기 때문이다. 내가 실천하는 '열린원림문화' 향유에서의 원림은 가까운 임천이다. 다행히 호수까지 있어 윤선도의'어부사시사' 「동사7」에 나오는 풍광을 수시로 모신다. 산줄기 묵직하게 떨어져 쏟아지듯 호수로 뻗는 임계역(臨界域)에 단애취벽(丹厓翠壁)이 있더란 말이다.

 

단애취벽(丹崖翠壁)이 화병(畫屛)같이 둘렀는데

거구세린(巨口細鱗)을 낚으나 못 낚으나

고주사립(孤舟蓑笠)에 흥(興)겨워 앉았노라

<어부사시사, 「동사 7」, 현대어 풀이>

 

'어부사시사' 「동사7」은 ‘신명으로 바라보는 어와의 발견’이라는 글에서 한국고전번역원 이승현의 번역으로 다룬 적이 있다. 여기서는 붉고 푸른 절벽인 단애취벽(丹厓翠壁) 경관으로 「원림 리부트」에 기여하고자 시도한다.

보길도 원림의 세연정에도 세연지 쪽 산중턱의 옥소대를 타고 내려오는 산줄기와의 임계역에 단애취벽의 경관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화순의 적벽처럼 수많은 지역의 적벽에도 단애취벽은 늘 강렬한 심상을 남긴다. 단애취벽이 존재하는 곳은 하나같이 선명한 풍경을 표상한다. 이를 가능하도록 한 것은 단연 거구세린을 등장시켜 고주사립의 흥취를 세뇌처럼 각인시킨 「동사7」의 심미의식이자 경관미학인 것이다.

 

왼쪽: 화순의 창랑적벽의 단애취벽(출처 : 화순투어), 오른쪽: 광교 저수지 단애취벽
왼쪽: 화순의 창랑적벽의 단애취벽(출처 : 화순투어), 오른쪽: 광교 저수지 단애취벽

 

거구세린(巨口細鱗)이란 입이 크고 비늘이 자잘한 좋은 물고기인 농어를 말한다. 섭생을 즐겁게 해준다. 그런데 그 즐거움을 ‘누리나 마나, 낚시로 잡으나 마나’ 체념의 경지로 접어든 이유는 무엇인가. 대체 무엇이 행위의 동기를 와르르 원천봉쇄시켜 차단하였다는 말인가. 알고 싶으면 단애취벽 잎에 서야 한다. 그것도 홀로 띄운 배를 타고 도롱이와 삿갓을 걸친 고주사립(孤舟蓑笠)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낚시를 하려 했으나 단애취벽의 그림 병풍 같은 풍광에 흥취가 버무러져 다음 행동이 무엇일지를 좀체 아득하여 생각조차 못한다.

단애취벽(丹厓翠壁) 경관을 읽고 또 읽으니

가을이 지나 겨울을 흠뻑 보내고 나서야 어느 순간 이곳 원림에서의 단애취벽을 읽을 수 있었다. 한번 읽고 또 읽기를 수없이 즐기다 보니 단애취벽 앞 배 한 척에 고산 선생 홀로 앉아 거나한 흥취로 호수의 잔물결에 흔들리고 있는 환영이 점점 뚜렷하게 자리잡는다. 환영이 실체로 다가서고 나는 멀리 떨어진 세연정을 수시로 오가며 풍취를 나눔하고 있었다. 이곳 원림의 순간적 풍광을 통하여 저 먼 보길도의 풍경이 공유되는 놀라운 경험이 심미의식이며 풍경의 미학이다.

'열린원림문화' 향유를 통하여 지어진 작품 중에 ‘단애취벽’을 찾으니 다음과 같은 시가 근작시로 창작되었다.

 

첨광대 – 임천한흥.163 / 온형근

 

첨광대瞻光臺는 광교산 정상을 우람하게 바라보는

단애취벽 위에 자리 잡은 널찍한 마당이다.

형제봉과 광교산이 일직선으로 보이는

형교정兄敎亭과

광교저수지가 안팎으로 편안하게

눈매에 들어오는 호안정湖安亭 사이에

첨광대는 오랫동안 풍광을 아껴

풍경을 이뤘다.

 

​첨광대를 나서면 숲길이 이어지는데

울울창창하여 일찍이 벽수앵성 길이라

푸른 숲 꾀꼬리 노래하는 아름다운 오솔길

그러니 첨광대에 한 무더기 시름이나

아름지기 우울을 털어 둘 만하다.

- 2022. 2. 2

 

원림은 호수를 향하여 큰 줄기를 드러내거나 골을 숨긴다. 숨긴 골은 호수에 안착하여 새의 보금자리로 각별하다. 우람한 산줄기는 뭉툭하여 기운이 넘친다. 급격하게 불쑥 튀어 나온 곳은 대(臺)를 이루었다. 멀리 앞산이 첩첩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린다.

그중에 첨광대(瞻光臺)는 광교산 정상을 직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자리하였다. 그 아래 호수와의 임계 부분에서는 넘치는 산 기운이 만들어 낸 단애취벽이 일품의 경관을 이룬다. 첨광대를 전후하여 우람한 산출기 정상에 형제봉과 광교산이 바라보이는 형교정(兄敎亭)과 호수가 좌우로 편안하게 펼쳐지는 호안정(湖安亭)을 위치시킨다. 첨광대 이후의 아득한 숲길이 있으니, 첨광대에서 시름과 우울을 한 무더기씩 털어 둘 만하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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