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시대] 다산 정약용의 두 번째 유배지 장기숲(장기임수)
[조경시대] 다산 정약용의 두 번째 유배지 장기숲(장기임수)
  • 최재군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22.02.23
  • 호수 67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Landscape Times] 장기현 유배지에서 생활

1800년 11월 정조대왕의 국상이 마무리된 후 나라에 큰 소용돌이가 일었다. 정조의 탕평책으로 잠잠하던 정국에 피바람이 불었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과 천주교인이 본격적으로 탄압받기 시작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위기감을 느끼고 귀향을 결심했다. 이듬해 2월 다산의 셋째 형 정약종의 책롱(책을 넣어 두는 농짝) 사건이 발생하고 정씨 가문은 몰락하며 폐족이 된다. 정약종은 참수형을 당하고 둘째 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에 처해 졌다. 다산은 1795년 해미 유배 이후 두 번째 유배를 당한 것이다.

장기는 조선의 대표적인 유배지 중 하나였다. 한양에서 천 리(400km)나 떨어진 외진 곳으로 문헌에 200여 명의 인물이 다녀간 곳으로 전해진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다. 송시열은 노론의 우두머리로 다산의 외가 6대조인 윤선도와 예송논쟁으로 대립하던 인물이다. 송시열은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에게 밀려나 1675년 1월 함경도 덕원부로 귀양 갔다. 5개월 만에 장기로 이배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120여 년 전 송시열이 거쳐 간 곳은 다산의 유배지가 되는데 경상도 장기와 전라도 탐진(강진)이다.

다산이 장기에 도착한 날은 1801년 3월 9일이다. 이날 장기 현감 황면기가 다산을 맞이하였다. 그날 밤은 현감의 배려로 관아에서 숙식하고 다음 날 배소(거처)로 향했다. 장기읍성 동쪽 누문인 조해루를 나와 장기천변 자갈밭의 남루한 오막살이에 도착했다. 집주인은 농사일하며 관아에서 포졸을 겸하고 있는 성선봉이다. 나이가 많은 집주인은 다산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고 감시하는 보수주인이다. 다산의 장기에서 생활은 궁핍했다. 마을은 생선 기름 짜내는 일로 비린내가 진동했고 반찬으로 나오는 김무침에 머리카락이 끌려 나왔다. 더구나 밥에는 모래가 섞여 있어 씹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척박한 남쪽 땅 장기의 음식과 물은 다산의 입에 맞지 않았다. 결국 병이 나 한 달 가까이 앓다가 일어났다. 다산이 장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산이 지은 기성잡시(장기읍성에서 지은 잡시)는 당시 상황을 읊고 있다.

먹고 자고, 잠을 깨면 배가 고파 배고프면, 술을 찾는데 금사주(金絲酒) 데우라지

도무지 소일할 만한 일은 없고, 이웃 영감 떼로 와서 장기 두는 게 고작이야!

장기읍성 전경. 동해로 연결된 하천이 장기천이다. ⓒ문화재청
장기읍성 전경. 동해로 연결된 하천이 장기천이다. ⓒ문화재청

 

송시열과 만남

송시열은 장기에서 4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그동안 성리학과 관련된 글을 쓰고 후학을 양성하며 학문을 전파하였다. 특히 자신을 감시하던 보수주인 오도전을 제자로 삼아 글을 가르쳤다. 오도전은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고을의 훈장이 되었고 훗날 스승을 배향한 죽림서원을 세운 인물이다.

어느 날 다산은 송시열의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신 죽림서원에 찾아갔다. 다산이 속한 남인의 철천지원수, 당시의 노론이 있게 한 장본인 송시열의 후학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대역 죄인이며 정파가 다른 남인이 죽림서원을 찾는 것은 모험과 같았다. 쉽게 받아주지 않을 거라 예상하며 집을 나서 장기천 둑을 따라 읍성 남쪽에 자리한 서원을 찾았다. 혹시 봉변당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하여 유생들이 적은 초저녁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에 납촉(蠟燭, 밀랍으로 만든 초)을 들고 서원의 문을 두드렸다. 서원에는 다산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 외삼문 밖에 도착하여 사람을 불렀고 유생들이 나왔다. 정약용을 알아본 그들은 다산을 내쫓았다.

대역 죄인으로 부모의 제사도 모시지 아니하는 천주교도가

어찌 우암 선생을 배향한 곳에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썩 물러가시오!

여보시오. 어찌 그리 말할 수 있소.

정 그러하시면 책이라도 빌려 볼 수 없겠소?

그대에게 빌려줄 책이 없소 그러니 물러가시오!

죽림서원의 유생들은 문전 박대하며 다산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다산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고 물러났다. 정파를 떠나 학문을 논하고 여의치 않으면 책이라도 빌릴 생각으로 서원을 찾은 다산은 붕당의 아픔만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당시 유생들이 다산을 받아주고 학문을 논하며 교류하였다면 지금의 장기는 강진(탐진) 못지않은 명성을 얻고 있었을 것이다.

1910년대 추정 사진. 장기읍성 밖 향교와 우측으로 장기숲이 보인다.
1910년대 추정 사진. 장기읍성 밖 향교와 우측으로 장기숲이 보인다.

 

다산과 우암을 위로한 장기숲

다산이 거처한 성선봉의 집은 죽림서원에서 가까운 장기천변으로 지금의 장기초등학교 자리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송시열이 4년 동안 생활하던 지역이다. 지금도 학교에는 송시열이 심은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다. 다산의 거처 주변에 유림(楡林), 즉 느릅나무숲이 있었다. 다산은 이곳을 산책하며 시를 지었는데 현재 장기중학교 내의 느티나무숲으로 보는 설과 장기천 제방에 식재된 나무로 보는 설이 있다. 하지만 구체적이지 않다. 옛날 지도와 일제강점기 마을 숲을 기록한 ‘조선의 임수’를 토대로 살펴보면 장기천 남쪽에 조성된 ‘장기임수(장기숲)’로 여겨진다. 이 숲은 동해로 침입하는 왜적으로부터 읍성을 은폐하고 숲 하부에 탱자나무를 심어 적의 침입을 저지하는 지성(枳城, 탱자나무 성)의 역할을 하는 숲이다. 경상도읍지에 따르면 장기숲의 규모는 길이 7리, 너비 1리로 그 면적이 무려 112ha에 이른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조선의 마을 숲 중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임수(林藪)는 숲을 말하며 숲쟁이, 숲정이, 당숲 등으로 불린다. 일제강점기 장기숲은 다산 유배 시기에 존재하고 있던 숲이다. 장기숲은 다산의 글에 유림(楡林, 느릅나무숲)으로 기록되었다. 느릅나무가 우점하며 장기천 제방을 따라 길게 조성된 숲이다. 다산은 지팡이를 끌고 장기천 모래사장과 숲길을 따라 산책하고 ‘저물녘에 느릅나무숲 속을 거닐며’라는 시를 지었다. 장기숲이 의지할 곳 없는 다산을 위로해 준 것이다.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 직원이던 도쿠미쓰 노부유끼(德光宣之)가 1938년 저술한 ‘조선의 임수(朝鮮の 林藪)’에 장기숲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규모는 19ha로 길이가 3.4km나 되며 해안가로 연결된다. 상층 수목은 왕버들, 참느릅나무, 이팝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회화나무 등이다. 이 중 큰 것은 가슴 높이 둘레가 4m에 이른다. 지금은 보호수나 되어야 찾아볼 수 있는 크기다. 하층은 꾸지뽕나무, 곰의말채나무, 산초나무, 병아리꽃나무, 복분자딸기 등이며 탱자나무는 밀생하고 지표면 지름이 20cm며 높이가 2m로 지성(枳城)의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정도다. 장기숲은 국방 서적 ‘관방집록’에서 제시하는 ‘수목으로 조성하는 목성’과 ‘탱자나무의 지성’을 교과서적으로 제시하고 있던 숲이다. 장기숲 탱자나무 열매는 약재로 거래되었는데 현재 가치로 연 400만 원의 수입을 얻었다.

다산은 마음이 답답할 때 읍성의 조해루에 올라 일출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들어오는 동해의 풍경이 맘에 들어 시를 지었는데 일출 풍경을 어가에 비유하고 정조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슬픔에 잠기곤 했다. 다산은 어딜 가나 정자와 산천을 유람하고 글을 남기었다. 그러나 장기에서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생활이 고단했고 마음이 편치 않은 시기였다. 단지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거나 장기숲을 산책하며 마음을 달래는 정도였다. 산천을 유람하지 못하는 마음은 과거에 다녀본 정자를 회상하며 위안을 삼았다. 다산은 장기에서 7개월 동안 매일매일 장기숲을 거닐며 붓을 벗 삼아 180여 편의 시를 지었다.

1872년 장기현 지도. 장기천을 따라 숲이 그려져 있다. 다산이 거닐며 시를 짓던 장기숲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1872년 장기현 지도. 장기천을 따라 숲이 그려져 있다. 다산이 거닐며 시를 짓던 장기숲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 시기 다산의 글에 자신을 해당화에 비유한 작품이 있다. 온갖 잡초 속에서 자리를 지키고 꽃을 피우는 해당화를 칭찬하는 것이다. 또 귀양 오기 1년 전 18살 많은 이기양이 북경에서 얻어온 수선화 한 뿌리를 구해 화분에 심고 감상하던 때를 회상하며 글을 썼다. 이외에도 죽취일(竹醉日)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죽취일은 음력 5월 13일로 이날 대나무를 옮겨 심어야 잘 산다고 하여 지정된 날이다. 다산답게 나무와 꽃, 정원과 관련된 글을 남긴 것이다.

장기에서 고단한 다산의 생활은 7개월 만인 10월 초순 큰 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마무리된다. 정적들은 다산을 백서사건과 엮어 죽이고자 했다. 10월 20일 한양으로 압송된 다산은 신지도에서 올라온 정약전과 갖은 국문을 당하고 또다시 긴 유배 길을 오르게 된다.

장기숲은 전통조경에서 주목해야 하는 중요한 마을 숲이다. 군사적으로 읍성을 보호하고 숲 자체는 탱자나무 성곽이 되며 하천 제방을 보전하여 농경지를 보호했다. 또 마을에 수익을 제공하는 경제림이며 백성들의 휴식처가 되고 시인 묵객의 작품에 소재가 되는 전통조경 유산이다. 장기숲이 현재까지 온전히 유지되었다면 500년 이상 전해지는 전통 마을 숲으로 세계적인 수목원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 장기숲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산을 사숙하며 우리네 전통 정원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 장기숲이 복원되길 기원한다.

최재군 수원시 공원녹지사업소 공원관리과장

[한국조경신문]

최재군 객원논설위원
최재군 객원논설위원 cjk2809@korea.kr 최재군 객원논설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