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 Times] 세상은 욕망으로 하여 움직인다. 욕망은 살아있음의 증거이다. 죽어있는 개체 외에는 어떤 생명체도 욕망이 행동의 원동력이 된다. 도시의 콘크리트 건물 안도 사막의 뜨거운 열기 속도, 북극의 빙하에도 아프리카의 초원도, 하늘 위도 땅 위도 땅 속도 모두 욕망의 결전장이다. 자연은 나의 욕망과 너의 욕망이 엉키어 만드는 크고 작은 생명의 이야기들을 즐기는 듯하다. 그 스토리들을 감상하려고 우주와 지구와 땅과 태양이 있는 건 아닐까? 그 안에서 식물처럼 생물들의 갖은 욕망을 다 품고 지내는 존재가 있을까?

동물들은 안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높은 나뭇가지에서 휴식하고 잠잔다. 나무는 새들의 집터이고 원숭이들의 잠자리이다. 덩치 큰 초식동물들은 나무에 깃들 수 없지만 나무가 제공하는 것들을 먹거리로 삼는다. 갖가지 동물들이 엉켜 지내는 야생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그건 ‘욕망’이다. 작고 연약한 동물들이 최고로 위험에 노출될 때는 그들의 욕망을 채울 때이다. 동물의 배설물을 먹기에 여념이 없는 딱정벌레는 도마뱀이 욕망을 채우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알아챌 수 없다.

짝짓기를 위해 힘겨루기를 하는 수컷 영양 두 마리는 치타가 숨죽여 자신들을 노리고 있음을 전혀 알 수 없다. 덩치 큰 코끼리가 갈증을 해소하러 강에 내려올 때 악어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지켜본다. 욕망을 충족하기에 정신이 빠진 동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자연이다. 인간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특히나 인간의 욕망은 한계가 없는 탓에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자신을 욕망의 제물로 바칠 때가 많다.

그렇게 생명의 법칙은 얄궂다. 슬프지만 무욕(無欲)의 상태를 유지하기란 살아있는 생명체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동서양의 현자들이나 종교의 창시자들은 이 욕망의 문제를 예민하고 지혜롭게 다루었다. 이 지점에서 자연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을 지켜보고 사는 식물의 욕망으로 눈을 돌려 보자. 식물은 아주 깜찍하게 자신의 욕망을 해결한다. 식물은 선결제 방식을 택한다. 요즘 유행하는 ‘정기구독’ 방식도 많다.

식물은 자신보다 타자의 욕망에 먼저 관심을 기울인다. 다른 동물들이 원하는 것을 자진해서 풍성하게 생산해서 제공한다. 어쩌면 식물은 타인의 욕망에 더 민감한 것처럼 보인다. 동물들은 이 식물의 생산물에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린다. 꽃이 피면 꽃의 화밀을 즐기는 놈이 있고 풍성하고 향기 좋은 꽃 자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놈도 있다. 초식동물 중에도 이파리만 얌전하게 먹는 놈이 있고 아예 가지를 꺾어서 해치우는 놈도 있다.

나무들은 무화과 열매를 비롯한 산물을 장만하여 오가는 길손 차별하지 않고 제공한다. 새들이건 동물이건 가리지 않고 동물들은 식물의 열매를 즐긴다. 아, 그렇지! 강물 속의 물고기들도 강가에 맺힌 열매를 호시탐탐 노린다. 열매를 즐기려고 점프 실력을 자랑한다. 단지 먹거리뿐일까? 덤불은 아프리카 늑대에게 쫓겨 생사가 갈리는 호로새의 은신처가 되어 주기도 하고, 높고 큰 나무의 뒤엉킨 가지는 새끼 원숭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식물이 얼마나 많은 동물의 셀 수 없는 욕망을 충족해 주는지는 길게 말하면 잔소리이다.

그들은 자선사업가처럼, 아무리 퍼 올려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별별 동물들의 수요와 욕망을 모두 충족시킨다. 심지어 두 발 달린 인간조차도 자신의 삶과 역사를 두루두루 길게 식물에 의존해 왔다. 식물 또한 다른 동물들처럼 생로병사를 겪고 죽으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자연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식물은 자신의 욕망과 다른 생명체의 욕망을 하나로 엮는 재주를 가졌다는 점이다. 태곳적부터 욕망이 충돌하는 많은 사건들을 지켜보다가 그런 지혜를 터득했을까?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전쟁터 속에서 식물은 평화로운 윈윈(win-win) 전략을 채택했다. 도덕의 황금률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예수도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식물의 식탁에서 배를 불리고 식물의 약국에서 병을 치료하고 식물이란 거처에서 안식과 휴식을 누린 동물들은 의도라곤 없지만 식물을 위해 무한 봉사함으로써 식물의 욕망을 채워 준다. 인간 또한 식물의 욕망에 적극 봉사한다. 식물의 종자를 더 좋게 만들고 식물을 심고 가꾸고 애지중지한다. 사실 인간이란 동물은 자신 아닌 다른 종들의 욕망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오히려 동물들의 경우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활용하고 이용하고 조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을 학대한다. 그런데 식물에게는 다르다. 인간은 아주 다양한 이유로 식물의 일이라면 팔 걷어 부치고 봉사한다. 식물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타인의 욕망에 부응하여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것, 그렇게 하여 너와 내가 공존하는 것, 이것이 식물이 욕망을 다루는 방식이다. 좀 있으면 봄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수줍게 아름다운 봄꽃들에게 그의 욕망을 물어보자. 그리고 우리도 그들에게 한 수 배우자!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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