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식물노마드] 그대, 불멸을 꿈꾸는가?
[최문형의 식물노마드] 그대, 불멸을 꿈꾸는가?
  • 최문형 성균관대 학부대학 겸임교수
  • 승인 2022.01.19
  • 호수 6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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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scape Times] 얼마 전 혈육과의 영원한 이별이 있었고 더불어 주변 몇몇 분들의 안타까운 투병이야기가 들려왔다. 나이와 관계없이 언제까지나 싱싱한 초록으로 곁에 있을 것 같던 분들의 황화(黃化)는 까마득한 우울감이 되어 맴돈다. 그분들의 연두색 이파리인 손자들은 이 겨울에도 사랑과 관심을 먹으며 쑥쑥 자라고 있는데 말이다. 우주의 계절이 돌고 있다면 사람 세상 안에도 24절기가 공존한다. 갓 태어날 아기와 죽음을 향한 노인, 마악 떡잎을 올리는 유아와 황화의 채비에 들어선 중년!

때가 되면 우리는 자신만의 절기에 진입한다. 하지만 생의 사이클이 영원할 거라 착각하며 산다. 순간 나목이 되고 언젠가는 쓰러져 한 생을 마감하는 걸 망각한다. 왜 우리는 삶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많은 오해를 할까? 그건 아무래도 우리가 늘상 마주하는 식물들 탓일 것이다. 식물들의 무한한 사이클, 그들의 천연덕스런 반복 앞에서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니까. 인생의 매순간 우리는 그들과 마주하면서 시작과 끝을 배우고 다시 시작을 알게 된다. 네 개의 계절을 가진 땅에서는 그 현상이 극심하다.

봄부터 가을을 돌아 겨울, 다시 봄을 맞는 식물들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제 곧 겨울이지만 조금만 지나면 새 봄이 시작된다고! 알고 보면 이 생각들은 아주 고대로부터 계속 이어져왔다. 인간은 고대부터 꽃들을 사랑하고 가까이했다.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장엄한 신들에게 꽃을 바치고 신전을 꽃으로 장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커리플랜트가 마르면 불멸의 꽃꽂이를 만들어 신전을 장식했다. 식물과 꽃이 반복과 재생을 거치며 죽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일찍이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불멸의 욕망으로 정원을 가꾸며 꽃을 애지중지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정원은 수련, 수레국화, 양귀비, 석류나무, 돌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 캐모마일로 가득 찼으며, 중국인들은 정원에 인삼, 동백, 진달래, 뽕나무, 감, 차 등을 심어 즐겼다. 또한 신들의 영험이 식물로부터 비롯됨을 알았고 불멸의 꽃으로 신전을 꾸몄다. 영원한 존재인 신에게 왜 불멸을 헌사했을까? 그들이 숭앙하는 신들조차 알고 보면 불사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 신들이 영존하며 자신들을 거두어 주려면 불멸하는 식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들은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와 지구 도처 종교적 성지나 교회나 사찰이나 수도원이나 성당, 심지어 무속의 신들을 모신 곳에도 꽃들이 무성하다. 망자(亡者)의 무덤에도 꽃들이 그분들을 수호한다. 요즘은 입관할 때도 구석구석 화려한 꽃들로 빼곡하게 채워 가는 이를 배웅한다.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쓸쓸한 마지막 길의 동반자는 바로 꽃인 셈이다. 꽃이 지닌 생명력을 빌어 망자의 부활을 염원하는 것일까? 사랑을 할 때나 이별할 때나 생일이나 기일이나 꽃은 늘 우리 곁에 있다. 단순히 향기와 미모가 그들에게 많은 역할을 주었을까?

어쩌면 꽃 뒤에 숨어있는 열매와 씨앗의 상징성이 불사(不死)와 불멸(不滅)이란 인류의 영원한 소망과 이어진 것이 아닐까? 피고 지고 또 피고 열매를 맺어 떨구고 다시 열매 맺는 식물의 영속성이 신전에 사원에 무덤에 그들을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인간은 동물이면서 식물을 꿈꾼다. 엔간한 지혜를 지닌 사람이라면 동물은 불가능한 식물의 영속성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멸을 꿈꾸는 인간의 원초적 갈망을 식물이 일찍이 알아채었나 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마디마디를 장식하는 셀 수 없는 꽃과 식물들, 마지막 길에까지 동반의 자격을 획득한 그들! 그들의 자리는 언제나 우리 곁이다.

우리가 그들처럼 살기는 힘들어도 그들을 원하는 우리의 욕망은 불멸이다. 옛 사람들은 불멸의 존재로 하늘을 꼽았다. 하늘은 변함없고 하늘은 여전하다. 지금은 천도교가 된, 한국의 멋진 자생종교 동학의 진리는 ‘사람이 자연’ 이고 ‘사람을 하늘로 섬기라’는 것이다. 까마득한 하늘의 본연과 작용은 ‘자연’으로 우리 곁에 내려앉았다. 인간은 작은 우주이고 ‘하늘’ 그 자체이다. 그리고 자연을 대표하는 존재는 다름아닌 ‘식물’이다. 그렇게 하여 하늘과 자연과 식물과 인간은 나란히 동질선상에 자리하게 되었다. 사람은 사람을, 자연을, 식물을 하늘로 여겨 존중한다.

자연과 식물과 하늘은 쉴 사이 없이 변하는 중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기 때문에 불멸한다. 인간의 욕망인 불멸은 어떻게 달성될 수 있을까? 식물처럼 하늘처럼 유연한 존재가 되면 된다. 도를 닦아 높은 경지에 오른 선인(仙人)들은 그래서 자연 속에 살았다. 도시에 있다고 문명 속에 있다고 안될 것은 무언가? 내 마음 속에 자연의 자리를 두면 된다. 내가 누군가를 하늘로 대할 때 그는 나에게 불멸의 존재가 된다. 내가 나를 자연으로 누릴 때 나 자신의 욕망은 충족된다.  

[한국조경신문]

 

최문형 성균관대 학부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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