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겸 (주)에스이디자인그룹 공공디자인연구소 소장
이태겸 (주)에스이디자인그룹 공공디자인연구소 소장

마감 시즌인 연말을 지나고 있다.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작업을 하다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보이는 산을 바라본다. 온몸을 꽉 채우고 있던 긴장과 스트레스가 조금은 풀리는 듯하다. 관련 연구를 살펴보니 자연을 접하며 일하는 근로자들이 그렇지 않은 근로자들보다 병가를 내는 시간이 11시간 정도 적으며, 실내에서 창문을 통해 자연을 보는 콜센터 직원들의 업무속도는 그렇지 못한 직원들보다 6~12% 빨랐다. 또한 브리즈번 주민 1,500명을 대상으로 매일 30분 이상 녹지를 접하게 했을 때, 우울증과 고혈압 관리에 자연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연구도 있다. 도시의 일상생활에서 ‘자연’을 ‘복약(服藥)’하는 것만으로도 환자가 더 빠르게 치유되고, 근로자의 생산성이 높아지며, 어린이의 학습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일상생활이 조금 더 건강해질 수 있다. 필자가 창밖으로 펼쳐진 산을 보고 스트레스 지수가 낮아졌다고 느낀 것 또한 실제로 ‘자연복약’의 효과를 체감한 것이다.

숲 걷기, 정원 가꾸기, 조류 관찰과 같은 직접적인 신체적 접촉이나 체험이 가능한 경우 자연복약의 효과가 가장 높다. 실내의 벽면녹화, 수족관에 가는 것뿐 아니라 자연이 주 대상인 풍경화나 정물화, 벽화, 핸드폰 화면의 이미지를 통한 간접경험도 효과가 있다. 메타버스와 같은 가상공간에 구현된 회의실의 화분, 자연과 관련된 독서나 자연보호를 위한 시민활동을 통해서도 자연복약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넓게는 자연을 인식하고, 만들고, 돌보고, 즐기고 나아가 자연의 편에 서서 움직이는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연적인 요소를 주로 다루는 조경인들은 자연이란 치료제를 상시 복약하는 사람들이다.

지속가능한 도시를 연구하는 티모시 비틀리(Timothy Beatley)는 ‘바이오필릭 시티(Biophilic City)’ 책에서 자연을 복약하는 방법의 하나로 ‘도시자연식단(urban nature diet)’을 제시한다.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녹지를 가까이하고, 때때로 자연에 몰입하는 경험은 인간의 정신과 몸 건강을 지키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의사들도 자연을 통해 우울증, 고혈압 등의 증상을 개선하고자 야외활동 등의 이름으로 도시자연식단을 처방하기도 한다.

도시자연식단은 다양한 규모, 빈도, 지속성, 강도로 구성된다. ‘자연 피라미드(Nature Pyramid)’를 통해 어떻게 건강한 도시자연식단을 구성해야 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매일 우리는 생활하는 곳 주변에서 잠시 햇살, 바람, 비, 구름을 느낄 수 있다. 사무실이나 침대 곁에 작은 화분 하나를 가꾸거나 길을 걸으며 가로수와 가로정원을 접하는 것은 매일 쉽게 할 수 있는 자연복약법이다. 그리고 주 3회 20분씩 좀 더 먼 거리의 공원을 가거나 동네 둘레길을 걷고, 1달에 5시간 이상 근교 산이나 강과 같은 반야생의 자연을 만나고, 1년에 한 번씩은 한라산, 광활한 바다, 웅장한 폭포와 같이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자연의 경외감을 느낄 수 있는 곳에 방문을 권한다. 마치 식물이 일정량 이상의 광합성을 해야 건강하게 자라는 것처럼, 인간도 체계적으로 도시자연식단을 섭취할 필요가 있다.

자연 피라미드 (자료:싱가포르 국립공원위원회)
자연 피라미드 (자료:싱가포르 국립공원위원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연이라는 치료제를 쉽게 접하기 위해서는 생활공간 가까운 곳에서 자연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도시 및 오픈스페이스 계획 방법론으로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이론에서 파생된 ‘바이오필릭 도시’가 있다. 바이오필리아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연 가운데 있을 때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의미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삶도 중시하는 인문학적 개념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도시 내의 물리적 환경에 자연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성을 높인 공간이 바이오필릭 도시이다. 바이오필릭 시티는 단순한 도시계획 방법론이라기보다 지속가능한 도시가 가야 할 철학적이고 정책적인 방향이다.

바이오필릭 도시는 생태계서비스의 공평한 분배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생태계서비스는 인간의 복지를 위해 이용되는 생태계의 측면으로 공원, 녹지, 도시숲 등을 포함한다. 생태계서비스는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과 관련이 크므로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되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녹지는 사람들에게 양질의 생태계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실질적인 혜택의 범위는 반경 몇 킬로 정도로 유한하다. 아무리 잘 조성된 공원이라 하더라도 생활권에서 멀어질수록 효과는 감소한다. 대규모 공원보다 생활권 주변의 소규모 녹지 및 자연적인 공간 조성이 필요한 이유이다.

일례로 2020년 대도시 녹지접근성에 대한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맨해튼의 공원 간 평균 거리는 1.04㎞, 공원까지의 평균 도보 이동시간은 약 13.7분이었다. 반면 서울의 공원 간 평균 거리는 4.02㎞이고 공원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데에는 약 1시간 1분이 소요된다. 서울시는 녹지의 양과 질 모두 비교적 좋은 도시로 평가된다. 그러나 다른 대도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산, 강 등의 녹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녹지 간 연결이 촘촘하지 않아 생활권에서 체감할 수 있는 도시녹지는 부족한 편이다. 서울을 생태계서비스 수요자인 시민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지 못하다.

앞으로 현대도시에서는 대규모 개발사업을 제외하면 더욱더 일정 규모 이상의 녹지를 마련하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소규모 생활권 녹지 마련이 중요해질 것이며, 바이오필릭 시티의 지향점은 도시 속에서 언제 어디서나 자연을 접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어 미래도시의 적절한 도시계획방법으로 판단된다. 작은 화분, 길가의 화단, 벽면녹화, 옥상녹화, 실내 조경 등을 통해 가용 토지가 적더라도 언제나 녹지를 접할 수 있게 되며, 공평한 생태계서비스 분배에도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즉, 도시에 다양한 규모의 숲과 녹지가 고르게 많이 만들어질수록, 생물다양성이 높아질수록 바이오필릭 도시와 도시자연식단의 상호작용은 커질 것이다. 도시자연식단의 일상적인 실행 가능성이 커진만큼 자연복용의 효용 또한 증가할 것이다.

조경의 주 역할은 이러한 상호작용과 혜택을 키우는 일이다. 조경인은 일상에 자연을 가져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드는, 바이오필릭 도시를 만들어가는 전문가이다. 건강하면서도 환경·사회적 가치를 담은 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조경인들의 역할은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라 믿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연의 힘을 느끼며 맡은 일에 매진하고 계실 모든 조경인들의 건승을 빈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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