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 Times]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오랜 인류 역사의 흐름이 어떤 패턴을 형성하며 나아가고 있다면 어떤 비슷한 상황과 원인에 의해 과거 발생했던 사건과 기류가 다시금 반복될 수 있다는 얘기다. 거의 문명의 태동과 함께 시작된 크고 작은 정원의 역사 속에도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때로는 그 유행이 반복되기도 하고, 때로는 동서양을 오가며 정원 스타일과 식물들이 서로 융합하며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정원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기 위해 정원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역사를 알면 정원이 보인다. 우선 정원의 양식, 정원 소재, 조성 기법에 대한 편협한 시각과 섣부른 견해를 탈피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다양성과 창의력, 정원에 대한 건강한 논쟁과 선의의 경쟁을 장려할 수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정원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여러 혜택들을 재발견하여 현대 사회가 맞닥뜨린 여러 이슈들을 해결할 수도 있다. 기나긴 정원 역사에 대한 고찰 없이는 현대 사회에 가장 적합하고 발전적인 정원 양식의 트렌드를 제대로 파악하고 진일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류 문명과 함께 정원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계속 지속되어 왔던 흐름, 혹은 어떤 반복되는 유행 같은 게 있었다. 가령 실내 화분 식물에 대한 열풍이 어제오늘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여러 나라의 문화에 걸쳐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식물을 화분에 심어 집 안으로 들였다. 특히 향기 좋은 꽃을 피우는 식물은 실내 공간에서 나쁜 냄새들을 없애 주며 사람들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었다. 조선 시대 문신이자 서화가인 강희안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원예서인 ‘양화소록’에서 화분 식물을 어떻게 기르면 되는지 자세히 다루었는데, 심지어 오늘날 유행하는 ‘식멍’, ‘꽃멍’과 유사한 ‘와유(臥遊)’의 개념, 즉 방에 누워서 식물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즐기는 감상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17세기부터 유럽에선 유리 온실과 오랑주리가 성행했는데, 그 안에는 감귤나무를 비롯해 각종 열대, 아열대 식물들이 그득했고, 특히 겨울 동안 향기로운 꽃들이 풍성해서 바깥 정원이 잠시 소강 상태인 계절에 정원을 즐기기 좋았다. 그 모습은 오늘날 백화점이나 대형 카페와 레스토랑에 온실 같은 프레임을 조성하고 식물들을 가득 채워 놓은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8세기에는 실내 식물을 전시하기 위해 아름답게 디자인된 컨테이너와 도자기 시장이 급성장했는데, 대표적인 브랜드로는 찰스 다윈의 외할아버지였던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가 설립한 웨지우드가 있었다. 이것은 마치 요즘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거세게 일고 있는 화분에 대한 열풍과 닮았다. 식물도 중요하지만 식물을 심을 화분을 선택할 때도 유명 공예가의 명품을 선호하는 추세인데, 어떤 토분은 입고되자마자 금세 품절이 되는 상황이다. 공장에서 싼값으로 대량 생산한 제품이 아니라 공방에서 장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특별 한정판 수공예품을 선호하는 것은 19세기 말 미술공예운동 시절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셈이다. 때로는 동서양의 정원이 서로 닮은 점도 발견된다. 영국의 풍경식 정원은 한때 중국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을 정도로 자연주의적인 동양미가 흐르는 것이었다.

자연주의 혹은 형식주의의 대결 구도는 정원의 역사 속에서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레퍼토리다. 인공적인 정형식 요소들을 배제한 자연주의 스타일을 고집한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 그리고 건축적 프레임과 확고부동한 선을 중시한 레지널드 블롬필드(Reginald Blomfield) 사이의 논쟁이 가장 유명하다. 양측 모두 주장을 굽히지 않은 가운데 결국 이 두 양식을 절충한 거트루드 지킬(Gertrude Jekyll)의 코티지 가든 스타일이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뭐든 극단으로 흐르게 되면 보다 합리적이고 융통성 있는 개념에 자리를 내주는 법이다. 정원에 쓰이는 식물을 놓고 자생식물이냐, 외래식물이냐에 대한 논쟁도 뜨거웠다. 독일에서는 국수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결국 나치주의와 연결될 정도로 정원에 자생식물만 써야 한다는 풍토가 있었는데, 칼 푀르스터(Karl Foerster) 같은 정원사는 국적을 초월한 다섯 대륙에서 온 식물들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새로운 숙근초 운동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동양과 라틴 양식을 비난하며 인종차별주의적으로 여겨질 만큼 엄격하게 자생식물을 강조한 미국의 조경가 젠스 젠슨(Jens Jensen)의 주장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완화되어 자연스럽게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디자인된 정원으로 발전되었다.

식재 디자인에 대한 논쟁도 만만치 않다. 다양한 식물을 혼합하여 식재하는 영국식 정원 스타일은 관목과 숙근초의 생태적 군락 식재를 선호했던 정원가들의 비난을 받았다. 특히 독일의 정원 설계가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폰 스켈(Friedrich Ludwig von Sckell)은 영국의 정원을 두고 ‘연결되지 않은 아름다움의 혼돈’이라고 지탄했다. 이 모든 논쟁들의 주제는 오늘날에도 정원과 조경 분야에서 자주 거론되는 핫 이슈이기도 하다.

오랜 역사에 걸쳐 세대가 바뀌어도 마치 서로 영원한 빌런처럼 양측에 서서 정원에 관한 논쟁을 벌이는 양상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서로 다른 정치 세력의 주도권 다툼 같기도 하다. 모든 장소가 지닌 특별함을 강조했던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처럼 서로 다른 양식과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문화가 더 확산된다면 앞으로 정원 분야는 지금보다 더 크고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사상 초유로 가을철에 개최된 올해 영국 런던 첼시 플라워쇼에서는 코로나19로 많은 것이 변모한 세상의 트렌드를 반영한 여러 의미 있는 정원들을 엿볼 수 있었다. 벌과 야생동물, 새들과 공존을 위한 야생의 초원 같은 정원 스타일이 등장하는가 하면, 발코니를 나만의 작은 파라다이스처럼 꾸며 다양한 먹거리와 꽃들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설계한 야외 키친 가든도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플라워쇼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실내식물 정원도 기발한 아이디어와 함께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아마도 비대면 활동이 증가하면서 개개인의 생활공간에 대한 중요성이 반영된 흐름일 것이다.

동서양에서 추구해 왔던 이상적인 낙원의 개념, 아름다운 꽃과 새들, 분수와 조각상이 있었던 로마시대 정원의 모습은 오늘날 아주 작은 생활 속 공간에까지 파고들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개개인의 생활공간이 더욱더 소중해진 현대 사회에 누구나 자신만의 호르투스 콘클루수스(hortus conclusus, 닫힌 정원을 뜻하는 중세시대 수도원 정원양식)를 꿈꾸는 것은 전 세계적인 트렌드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사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앞서 살펴보았듯 정원의 오랜 역사를 통해 반복되고 있거나 이미 존재했던 개념이 시대에 따라 좀더 부각되거나 쇠퇴할 뿐이다.

최근 우리나라에 급속도로 일고 있는 정원 열풍에 올바르게 대처하려면, 우리보다 먼저 훨씬 더 이른 시기부터 다양한 정원을 만들고 문화를 구축한 외국의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가든 캐피탈이라고 불리는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한 미국 동부 지역은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사례들이 많다. 프랑스 정원 양식으로 고도로 정형화된 느무르 사유지(Nemours Estate)가 있는가 하면, 윌리엄 로빈슨의 개념에 입각하여 예술적으로 자연주의 정원을 조성한 윈터투어(Winterthur), 자생식물에 특화된 마운트 쿠바 센터(Mt. Cuba Center)가 있다. 수목류와 숲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타일러 수목원(Tyler Arboretum)과 모리스 수목원(Morris Arboretum)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별장 부지에 그림같이 펼쳐진 정원과 테라스, 수준 높은 컨테이너 식재로 유명한 챈티클리어(Chanticleer),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 모든 요소들을 아우르며 정원의 대부격으로 각종 교육 프로그램과 심포지엄, 연중 다채로운 공연을 선보이는 롱우드 가든(Longwood Gardens)이 우뚝 자리잡고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정원을 비판하거나 폄하하거나 경쟁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들 정원은 모두 서로를 존중하며 각 시기별로 혹은 식물의 컬렉션과 테마별로 독창성과 다양함을 즐기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서로 상생 협력하는 구조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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