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식물노마드] 나와 마주하는 시간
[최문형의식물노마드] 나와 마주하는 시간
  •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 승인 2021.11.16
  • 호수 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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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scape Times] 가을만큼 사람을 설레게 하는 계절은 없다. 가을만큼 사람을 풍요롭게 하는 계절은 없다. 가을만큼 사람을 처절하게 하는 계절은 없다. 열매의 풍요와 만남의 풍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설렘과 이별의 처절함이 공존하는 게 가을이다. 나목(裸木)을 향해 달리는 나무들은 지독하게 아꼈던 존재들을 버리고 그 흔적들을 지운다. 가을은 나의 벗은 몸을 마주하는 때이다. 나무가 나신(裸身)을 즐기듯이 우리도 자신과 마주한다. 아주 조용하게 아주 고독하게 나란 존재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다.

가을에 우리는 방안에 머물 수 없다. 시시각각 떠나가는 나뭇잎들이 마음 문을 두들겨 대는 통에 신발 끈을 묶고 대문을 나서게 된다. 그 곳에 그들이 있다. 긴 날들을 쉬지 못하고 달려온 그들의 움직임을 가장 확연히 볼 수 있는 계절이다. 열매와 씨앗과 잎과 가지들이 온통 세상을 법석이게 한다. 이제 그들은 기다란 밤을 준비할 것이다. 그들의 밤은 조용하지만 시끄럽다. 아침에 할 일들을 마련하느라 그들이 푸근히 잠들지 못할 터이니.

발밑에 푹신한 잎들의 마중을 받으며 계절 속으로 들어간다.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햇빛이다. 가을이 되어야 태양도 제대로 보인다. 봄과 여름의 햇빛은 너무 분주해서 제 모습을 챙기지 못한다. 지구 위의 수많은 생명들을 거두느라 숨차게 지내니까. 하지만 늦가을의 햇빛은 여유롭다. 들녘이 황금빛이고 햇빛도 우아한 빛이다. 햇빛은 그들의 업적을 뽐내듯 서서히 찬찬히 대지와 마주한다. 나는 그래서 늦가을의 태양이 좋다.

햇빛은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들이 많아져서 정신을 못 차린다. 어디에다가 레이저를 쏘아야 할지, 망설인다. 높은 가지에 달린 몇 안 되는 단풍을 비추어야할지, 가을에도 푸르름을 자랑하는 상록의 잎들에게 가보아야할지, 아님 붉게 물들어 반짝이며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외치는 단풍들에게 놀러가야 할지, 땅에 내려와 새로운 세상을 즐기는 낙엽들에게 시선을 돌려야할지…그렇게 태양빛은 이곳저곳 쓰다듬어주기 바쁘다. 우리는 멈추어서 태양과 나무의 숨바꼭질을 지켜본다.

식물의 뒤치다꺼리 하느라 자연이 어느 때보다 바쁜 계절이 가을이다 ⓒ한재희
식물의 뒤치다꺼리 하느라 자연이 어느 때보다 바쁜 계절이 가을이다 ⓒ한재희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공기가 숨을 멎게 한다. 아름답다! 자연이, 그리고 그 자연 속의 사람들이! 하지만 태양은 바람의 질투에 밀려 황급히 고개를 넘는다. 바람도 가을에는 할 일이 많다. 가지에 달린 잎들을 떨구는데 힘을 보태야 한다. 이 가을에 그 일은 분주하다. 바람이 게으름을 떤다면 우리 모두는 새봄의 새잎과 꽃을 보기 힘들다. 한 해의 흔적을 벗어야 함이 나무의 숙명이고 이 일을 거드는 게 바람의 임무이다.

가지와 잎의 이별이 늦어질수록 나무는 힘이 부친다.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새봄에 새 것들을 피워 올리지 못할 위험도 있다. 늦가을의 한복판에서 나무들과 마주하며 생각해 본다. 내가 미련 맞게 집착하고 있는 건 무얼까? 새로운 세상과 만나지 못하게 나의 발목을 잡는 것은 무엇일까? 바람을 불러야겠다. 바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바람의 질투를 이겨내며 햇빛은 뜰에 머물고 가지에 속삭이고 잎에 입 맞춘다. 잎들은 태양의 키스를 받고는 가지를 떠나 살랑 내려앉아 대지와 만난다. 이제 땅의 차례이다. 땅은 열 달 내내 가지에 달린 잎들을 연모해왔다. 그들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제 계절이 달려와 잎을 만날 때가 되었다. 잎이 내려와 땅과의 진한 포옹의 시간이 열렸다. 감격스런 해후의 시간이다. 어떤 잎들은 땅과 오랜 시간 마주할 수 있고 어떤 잎들은 기약없는 이별을 바로 겪는다. 그리곤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다시 떠난다.

이별과 만남, 만남과 이별…그 안에 깃든 풍요와 공허… 가을은 그렇게 우리에게 새로움을 선사한다. 가을의 한 가운데서 다시 생각한다. 나의 인생의 계절은 어디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만나고 무엇과 헤어졌는가? 가을은 그렇게 우리에게 인생의 계절을 바꾸라고 한다. 어떤 것이 되었든 모두 만나라고 한다. 가진 것이 무엇이든 다 버리라고 한다. 나목이 되어 다시 태어나라고 한다. 모두 다 벗어던지고 자신과 마주하라고 한다.

그랬다. 계절을 달리면서 세상만 보았지 나를 볼 사이가 없었다. 태양과 바람과 대지의 도움을 받아 이제 한동안 나를 만나야 하겠다. 그렇게 가을은 내 안으로 들어왔다.

[한국조경신문]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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