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군 수원시 영통구 공원녹지과장
최재군 수원시 영통구 공원녹지과장

다산 정약용이 남긴 수많은 업적과 자료는 다산을 정의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정원 분야에서 다산은 당대의 위대한 정원가로 평가할 수 있다. 다산의 글 속에는 당시 그가 조성한 정원과 정원문화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다산이 부친의 근무지에서 즐겼던 명승지 유람과 정조와 함께한 창덕궁 후원에서의 풍류 그리고 유배 시절의 전원생활은 정원과 관련이 깊다. 필자가 다산을 주목하는 이유는 다산을 정원가의 시각에서 평가하고 그가 거쳐 간 옛 정원을 찾아 우리 정원의 가치를 찾는 데 있다.

다산의 유배

다산은 세 번의 유배를 당한다. 첫 번째 유배지는 서산시 해미이며 두 번째는 정조 승하 후 셋째 형 정약종의 책롱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된 포항시 장기이다. 마지막은 장기

유배 중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의금부에 압송되어 문초를 당한 후 유배된 강진군이다.

다산의 유배는 정조의 명을 거부하며 시작된다. 매화꽃이 피기 시작하던 1790년 2월 우의정 채제공이 임금의 최측근 관직인 예문관 검열에 정약용을 포함하여 6명을 추천하였다. 그런데 정적인 노론에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후보자를 선발하였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에 격분한 다산의 무리들은 최종 시험을 거부하게 되고 이를 보고받은 정조는 응시생 모두를 시험 장소에 가두고 강제로 시험을 보게 했다. 밤은 깊어가고 날은 추워 어쩔 수 없이 각자 답안을 작성하여 시험을 보았는데 정약용과 김이교 둘이 선발되었다. 다음날 정조는 다산을 예문관 검열에 단독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정의감에 불타고 혈기 왕성하였던 다산은 정치적 음해가 있었다며 두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려 정조의 어명을 거부하였다. 정조는 여러 차례 다산을 달래며 임명하였으나 다산은 따르지 않았다. 어명을 거부한 것이다. 마침내 화가 난 정조는 3월 7일 다산에게 서산 해미현으로 유배를 명한다. 다산이 명을 받아 동작 나루, 과천, 수원, 진위를 거쳐 서산 해미현에 도착한 것은 3월 13일이다.

해미읍성 소나무 숲
해미읍성 소나무 숲
1872년 해미읍성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872년 해미읍성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해미읍성에 당도한 다산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읍성을 둘러쌓고 있는 탱자나무와 읍성 내 옥사(獄舍) 앞을 지키고 있는 70년 된 울창한 회화나무였다. 탱자나무는 하얀색 꽃을 피우고 회화나무는 이제 겨우 잎이 나오는 계절이었다. 읍성 밖에서 다산을 맞이한 해미 현감 이한주는 진남문을 통해 동헌으로 다산을 안내하고 한양에서 해미까지 긴 여행을 위로하며 피로를 풀어주었다. 죄인의 몸이긴 하나 임금의 총애를 받는 다산을 지방의 6급 공무원이 죄인 다루듯 하지는 못하였다.

잠시 후 다산은 읍성의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청허정에 올라 읍성을 둘러보고 달빛에 반짝이는 천수만의 긴 갯벌을 바라보며 자신의 행동이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정적들의 시비를 이유로 임금의 명을 수차례나 거부하고 급기야 유배 길에 올라 해미에 와 있는 자신이 한편으로 부끄럽고 민망하기까지 하였다.

읍성 내에 거처하지 못한 다산은 읍성 밖 보수주인의 집에서 잠을 청하였으나 쉽게 잠들지 못하였다. 다음날 긴 밤을 보낸 다산은 현감이 안내해 준 약천 남구만(1629~1711) 선생의 옛집을 둘러보고 사당을 방문하여 예를 갖추었다. 다산은 다시금 자기 행동을 되돌아보며 평소 존경하던 약천 선생에게서 위안을 찾고자 했다. 약천은 정치가로 숙종 때 소론의 거두이며 방송인 남희석의 11대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다산은 약천 선생을 흠모하였다. 사당을 방문한 후 ‘해미남상국사당기(海美南相國祠堂記)’를 지었는데 당쟁이 극에 달하던 시절 나랏일을 공정히 처리하고 한편에 서지 않은 불세출의 위인으로 칭송하였다.

해미읍성 탱자나무
해미읍성 탱자나무

목민심서에서 다산은 약천 선생을 자주 언급하였다. 그 중에 ‘아전의 수를 줄여야 폐단일 줄일 수 있다.’는 글에서 약천 선생이 병조에 근무할 때 하급관리 백 명을 감원하였고 송시열은 이를 본받아야 한다며 임금에게 상소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다산은 어려서부터 사숙하고 존경하던 약천 선생을 찾아뵌 것을 위로 삼아 앞으로 공평한 목민관이 되고자 다짐하게 된다.

탱자나무 성(城)의 정원 요소

해미읍성은 탱자나무(枳)로 축조된 성(城) 즉 지성(枳城)으로 불린다. 읍성을 보호하기 위해 읍성 주변에 탱자나무 숲을 조성하여 군사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정원가로서 해미읍성을 답사할 때 반드시 살펴야 할 나무가 있다. 탱자나무와 옥사 앞 회화나무 그리고 읍성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소나무 숲이다. 현재 해미읍성에 탱자나무는 그리 많지 않다. 옥사 주변과 지성루(枳城樓)라 현판을 걸어둔 서문 안쪽의 내탁부 경사면에 10여 미터의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을 정도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복원하여 차별화된 읍성 경관을 보여주면 관광객 유치에도 큰 도움이 될 텐데 탱자나무 성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옥사 앞 탱자나무와 회화나무
옥사 앞 탱자나무와 회화나무

예전부터 탱자나무는 가시가 크고 많아 담장 대용으로 사용되어 왔다. 탱자나무 생울타리를 조성하면 도적을 쉽게 막을 수 있어 집이나 농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군사용으로 사용된 탱자나무는 포항의 장기 숲과 강화도의 외성이 있고 정조는 수원화성에 한 말 가량의 씨앗을 파종하였다. 관방집록에는 “느릅나무, 버드나무, 탱자나무, 가시나무 따위를 빽빽하게 심어서 얽히게 하고 엮어 목책을 만들되, 넓이는 50, 60보 정도로 하고, 둘레가 서로 연접되게 하면 곧 하나의 목성(木城)이 된다. 그 수목의 빈틈을 타서 활과 포를 비치하고 기다리면 우리 편은 믿는 데가 있지만, 적병은 의심스럽고 두려워서 감히 달려들지 못한다.”는 기록이 있다. 조경이나 약용으로 사용되는 탱자나무가 군사적으로 사용된 것이니 심고 가꾸는 일은 정원기술자인 동산바치가 담당하였을 것이다.

해미읍성 정문인 진남루를 들어서면 확 트인 시야에 노거수 한 주가 보이는데 이 나무가 회화나무다. 읍성 중간 정도 옥사 전면에 자리하며 수령이 300년이나 된다. 회화나무는 학자수라 하며 선비를 상징하는 수목이다. 홍만선의 산림경제에는 “중문가에 회화나무를 심으면 상서로운 기운이 모여 3대가 길하다.”는 내용이 있다. 회화나무는 삼정승(三政丞)을 상징하며 가문에서 정승이 나오길 염원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해미읍성의 회화나무는 가슴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줄기의 한쪽은 부패하고 수형은 왜소한 편이다. 1800년대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은 회화나무의 동쪽 가지에 철사 줄로 머리채가 매달리는 고문을 당하였다. 특히 대원군이 천주교인을 처벌한 1866년 병인박해 때 가장 피해가 심했다고 한다. 지금도 철사 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청허정
청허정

회화나무를 뒤로하고 동헌을 지나 구릉에 오르면 청허정이 자리하고 있다. 청허정(晴虛亭)은 읍성 내 가장 높은 곳에 세워졌는데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가 세운 정자다. 청허(淸虛)는 ‘잡된 생각이 없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이 정자는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해미읍성을 찾은 문인들이 시회(詩會)를 열거나 시를 읊으며 교류하던 곳이다. 청허정은 1872년 이전에 훼손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청허정 자리에 신사(神社)를 세우고 참배를 강요하였다. 가슴 아픈 곳이다. 현재의 청허정은 과거 기록을 근거로 2011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청허정을 지나 읍성 안쪽으로 들어가면 충청남도에서 100대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한 소나무 숲이 자리한다. 수령이 오래된 고목은 아니나 잘 가꾸어진 소나무 숲이 찾아오는 사람을 반갑게 맞이한다. 수령으로 보아 다산 시대에 자라던 나무로 보기는 어려우나 제법 고풍스러운 운치와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속세의 번잡함을 잊게 한다.

천년 고찰 개심사 유람

다산이 해미에 도착한 이틀 후 태안현감 유회(1739~?)가 찾아왔다. 유회는 다산보다 23살이나 많은 사람이다. 그는 1775년 문과에 급제하여 3년 후(정조 2년)에 사도세자 묘인 영우원을 지키는 수봉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 묘의 수봉관으로 임명하였으니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것이다. 다산은 유회와 읍성에서 8km 떨어진 곳에 있는 천년고찰인 상왕산의 개심사를 유람하고 하룻밤을 지냈다. 개심사의 느낌은 자연스러움이다. 자연과 조화된 우리네 정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진입로의 소나무는 제멋대로 자라고 범종각과 심검정, 종무소의 기둥은 원목의 수피만을 벗겨 그대로 사용하는 도랑주 기둥이다. 톱과 대패로 만들어진 원주나 방주도 아니고 멋들어진 배흘림기둥도 아닌 자연스러움 그 자체이다. 사찰의 정원요소와 경관은 마치 ‘이것이 정원이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정원의 소재가 되듯 나무와 돌, 물 자연을 이용한 고찰의 풍경은 태초의 우리네 모습 같다.

개심사 종무소의 도랑주 기둥
개심사 종무소의 도랑주 기둥

개심사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사찰로 글 중에는 주지 스님의 말을 인용한 문장이 매우 인상적이다.

 

“어디 가서 좋다고 소문내지 말아요. 사람들이 몰려오면

개심사도 끝이에요. 사람 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죠?“

“예!”

 

그러나 작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개심사를 다녀온 다산은 기회가 되면 호우(湖右, 현 충남)에서 가장 빼어난 정자로 알려진 영보정 유람 계획을 세웠다. 영보정은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에 있는 정자다. 현재의 보령시 오천항에 위치하며 가히 천하제일의 경치를 품고 있는 정자다. 그런데 다산은 해미로 유배 온 지 7일 만인 3월 22일 해배되어 한양으로 올라간다. 다산의 영보정 유람은 5년이 지난 후 금정(충남 청양) 찰방으로 좌천되었을 때 이루어진다. 정조가 다산을 해미로 유배 보낸 것은 평소 다산이 하고 싶은 전국의 유람을 도운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다산은 해미읍성과 개심사를 유람하고 특별휴가 같은 시간을 보냈다.

영보정에서 바라본 오천항
영보정에서 바라본 오천항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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