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 Tiems]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은 자연을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연의 품을 떠나 문명이 만들어 낸 도시와 현대에서 살게 되었지만 부드러운 흙을 지닌 ‘어머니’ 땅과 만물의 맏이인 식물이 기거하는 숲은 언제나 포근한 고향집이다. 자연에서 문명으로 이사한 인간들이 그리움을 달래려고 만든 장소가 바로 정원이다. 정원은 회상과 기억과 연모가 가득한 장소이다.

나무와 꽃과 새와 벌레가 살고 있는 정원은 옛적 에피쿠로스학파의 만남과 공부의 터전이기도 했다. 그들은 과일과 채소가 심긴 정원인 채원(kitchen garden)에서 바람과 햇빛, 땅과 물의 상호작용과 만물의 성장과 쇠퇴를 익히며 인생도 논했다. 식물들이 어우러진 정원은 자연스런 대화가 샘솟는 곳이었고 땅과 식물을 가꾸는 염려 뿐 아니라 인생의 걱정과 고뇌도 여지없이 나누었다. 정원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을의 정원에는 죽음과 삶이 교차한다. 아름다움은 유한한 삶에서 온다. 죽음의 흔적이 없는 곳에 어찌 아름다움이 있을까? 창세기의 낙원인 에덴은 모든 것이 구비된 곳이었다. 그저 기쁨만이 그저 생명만이 넘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는 땀을 흘려 땅을 경작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계속 낙원에 살았다면 성숙하지 못했으리라. 곡식과 채소를 심어 전전긍긍 애쓰며 기르는 동안 그들은 창조주 신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돌봄과 걱정은 그들을 진정한 신의 자녀로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우리는 생의 조건과 투쟁하며 산다. 가을 날 잘 키워놓은 과수밭에는 열매를 노리는 새들이 방문한다. 벼가 익어가는 논에도 잘 익은 곡식을 먹고픈 새들이 침범한다. 그렇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인간이나 모든 생명은 투쟁하고 산다. 인간의 유한한 생의 아름다움은 그저 돌봄과 염려이다. 숲을 그리워하여 만든 정원은 인간을 길러주는 유모 역할을 톡톡히 한다.

가을 정원의 물드는 나무들 ⓒ한재희
가을 정원의 물드는 나무들 ⓒ한재희

문명의 도시에도 구석구석 정원이 있다. 정원이란 게 생각하기 나름이다. 버젓하게 큼직하게 만들어진 정원이 아니어도 정원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눈을 돌려보면 버스정류장 가로에 심긴 화분의 화사한 꽃들과 작은 가게 모퉁이에 놓인 나지막한 나무도 정원을 이룬다. 시골집 담장 아래 감나무 몇 그루도 정원의 나무이고 아파트 베란다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화분의 꽃들, 다육이들, 난초들도 정원을 구성하고 있다.

이 작은 정원들은 ‘이모’인 셈이다. 우리 인간은 얼마나 숲을 그리워하는가! 어머니의 품인 숲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 살펴보면 아예 작정하고 숲을 옮겨온 사람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바로 분재이다. 낮고 평평한 화분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나무가 용틀임하고 있다. 나무는 제법 굵은 둥치를 가지고 있고 돌과 이끼가 무성하게 이웃한다. 구불구불한 소나무는 족히 100년은 되어 보인다.

껍질과 굴곡에서 세월의 향기가 배어난다. 푸르른 잎의 기상은 남산의 소나무 못지않다. 작은 화분에 살고 있는 고목의 아름다움! 이것이 숲의 모형이다. 그렇게도 자연을 그리워하는 인간은 결국엔 숲의 한 모퉁이를 삽으로 파 옮긴 듯 분재를 만들어 냈다. 자연과 숲을 향한 인간의 짝사랑과 집착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문명의 걸작품이다. 분재는 정원의 축소판이고 엄밀하게 말하면 숲의 축경(縮景)이다.

소나무가 어우러진 숲의 정경 ⓒ최문형
소나무가 어우러진 숲의 정경 ⓒ최문형

숲의 생명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생생한 현장이다. 작은 화분이지만 그 안에 내가 있다. 내가 살아 숨 쉬고 느끼고 뛰논다. 소나무의 굵은 껍질이 지나온 세월을 속삭여주고 휘어진 가지가 내 삶의 굴곡을 위로해 준다. 나무 발치의 파란 이끼는 숲의 비밀을 조곤조곤 일러줄 것만 같다. 마음이 텅 비어 허전할 때, 머리가 엉키어 복잡할 때 그들과 눈을 맞추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눈다. 우리는 그렇게 분재를 들여왔다. 분재는 인간의 오랜 ‘친구’이다.

누가 식물에 대한 우리의 짝사랑과 집착을 막을 수 있을까! 작은 분에 사는 나무에게 쉬임없이 물주고 거름 주고 가지치고 분갈이하는 수고를 탓할 수 있을까! 잠시 눈 돌리기라도 하면 연약해져 병드는 나의 친구, 벌레잡고 약 먹여서 건강을 지켜주어야 하는 존재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을까! 애지중지 건사해야 하는 숲의 한 모퉁이는 문명화된 인간인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제약과 한계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이 분재 앞에서, 정원 속에서 숲과 자연을 만난다. 프랑스의 계몽철학자 볼테르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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