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식물노마드] 죽어서야 주는 것
[최문형의 식물노마드] 죽어서야 주는 것
  • 최문형 성균관대 학부대학 겸임교수
  • 승인 2021.09.17
  • 호수 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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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scape Times] 씨앗이 익어가는 계절은 우리들에게도 기쁨이다. 푸른 잎이 알록달록 바뀌듯이 새파란 열매들도 옷을 갈아입는다. 익어가는 열매들을 보며 가을만이 주는 풍성함과 행복에 젖어든다. 어디 사람들뿐일까? 곳곳에 포진한 동물들도 열매들이 어서 익기를 손꼽는다. 아마 놈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무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코를 들이댈 것이다. 가을은 그렇게 뭇 생명들을 기대에 차게 만든다. 성숙과 변신이 교차하고 다채로운 색의 잔치들이 벌어지는 계절, 가을이다. 사람들 세상에서 가을은 이별과 통한다.

봄이 사랑의 시작을 알리고 여름이 정열을 보여준다면 가을은 단연, 이별의 시즌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식물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푸르렀던 잎들이 모체를 떠나는 낙엽의 풍경이 우리에게도 이별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식물은 하나는 살리고 동시에 하나는 죽인다. 살아가면서 죽어가는 신비가 식물에게서 가능하다. 씨앗과 열매를 키우고 이들이 자라나면 부지런한 일꾼인 잎은 다른 세상으로 떠난다.

잎의 변신과 죽음은 우리 인간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운다. 어릴 적 예쁘게 물든 단풍잎을 한 장 한 장 책갈피에 끼워 넣었던 기억이 있다. 파란 잎을 따는 건 미안해도 붉어진 잎을 따는 건 마음이 허락했다. 얼마 전 책 정리를 하다가 소녀 시절 넣어둔 단풍잎을 보았다. 수십 년 전 그 잎을 따서 보관했던 나의 손길과 마음이 다가온다. 그 때는 미숙했지, 그저 아름다운 잎이라고 갖고 있고 싶었지. 아니면 다른 친구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유행처럼 따라했던 거다. 문득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부끄러움을 다시 책 속에 가두느라 화들짝 덮어 버렸다. 가을에 흔히 보는 그 작은 잎은 그 시절에도 지금도 내게 많은 걸 이야기 해준다. 그렇게 식물은 죽어서도 가르침을 준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 사실 인간도 생명체인지라 식물처럼 죽음과 삶이 함께 진행된다. 하루를 더 살면 하루만큼의 인생이 차감된다. 살아가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 된다. 세포와 기관이 생생하게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노화가 진행된다. 우리는 에너지를 태워 조금씩 소진하면서, 살아가면서 죽어간다.

붉게 물든 잎은 죽음을 준비 중이고 영그는 열매는 삶을 기획한다.
붉게 물든 잎은 죽음을 준비 중이고 영그는 열매는 삶을 기획한다.

하지만 씨앗을 만들면 억울하지 않다. 식물의 씨앗이 열매이듯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두 종류의 열매를 만들 수 있다. 생물학적인 열매와 문화적인 열매이다. 자녀와 후손이 생물학적 열매라면 생각과 마음은 문화적인 열매이다. 문화적 열매는 도처에 있다. 거창하게 보면 특정 문명일 수도 있고 조금 좁히면 예술가들의 작품일 수 있고 더 축소하면 가훈이나 좌우명이다. 개개인의 삶의 철학 또한 문화적인 씨앗과 열매가 된다.

돌아가신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남기신 붓글씨 한 점, 살아계셨을 때 자손들에게 정성껏 쓰신 손 편지 한 장도 후손들에게는 맛있는 과육 속의 씨앗이다. 그 분들과 함께했던 시간과 기억들이 마음 속 깊이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식물들이 멋진 씨앗을 만들어 두었듯 위인과 영웅과 스승과 조상들 또한 우리를 위해 그것들을 남겨두신 거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죽어가고 죽어가면서 살아간다. 그 비밀을 식물이 가지고 있다.

지금 내게 찾아든 햇살 한 점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씨앗을 빚을 수 있다. 덜 익은 씨앗이 아니면 된다. 잘 영근 씨앗은 언제가 되었든 다시 죽어서 생명을 낳는다. 그래서 우리는 영차 영차 식물처럼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하루를 산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죽어서 주는 것이 더 많다. 그래서 죽음도 아름답다. 삶과 죽음이 선명하게 교차하는 가을은 맑은 하늘만큼이나 지독하게 찬란하다.

[한국조경신문]

최문형 성균관대 학부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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