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시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설계한 수원화성의 조경사적 가치
[조경시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설계한 수원화성의 조경사적 가치
  • 최재군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21.08.11
  • 호수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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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군 수원시 영통구 공원녹지과장
최재군 수원시 영통구 공원녹지과장

[Landscape Times] 다산이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간 해는 1783년 4월이다. 다산의 나이 22세로 정조는 과거에 합격한 유생들을 창덕궁 집무실인 성정각(誠正閣)에 초대하여 위로잔치를 베풀었다. 다산과 정조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날이다. 정조는 특별히 다산의 얼굴을 들라 하고 나이를 물었다. 당시 정조와 다산의 만남은 학문을 논하는 스승과 제자의 사제 관계로 발전하며 돈독해진다. 하지만 다산은 6년이란 세월 동안 대과에 합격하지 못해 임금을 뵐 면목이 없었다. 다산이 28세가 되던 해 드디어 대과에 합격하고 관직에 나아가니 정조와의 관계는 군신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다산은 스스로 정조와의 만남을 풍운지회(風雲之會)라 했다. 풍운지회는 용과 호랑이가 바람과 구름을 만나 세력을 떨치듯 뛰어난 임금과 어진 신하의 만남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정조를 이야기할 때 다산을 말하고 다산을 이야기할 때 정조를 말한다. 이 두 사람은 물과 물고기같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즉 수어지교(水魚之交)라 할 수 있다.

다산이 관직에 등용된 1789년은 정조에게 매우 의미 있는 한 해이다. 구 읍치 수원을 신도시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배봉산에 묻혀 있는 부친을 옮겨 모시고 원호를 현륭원이라 하였다.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처분으로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고 흉지 중에 흉지 배봉산 자락에 묻힌 지 28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사도세자의 묘(영우원)를 천하의 명당으로 옮겨 새롭게 조성하는 것은 정조 일생의 한(恨)이며 소원이었다. 현륭원 자리는 나라에서 인정한 조선의 3대 명당 중의 한 곳이다. 풍수가 윤선도는 ‘서린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니는 형국’ 즉 반룡농주(盤龍弄珠)라 했다. 다산은 사도세자 영우원 천원(세자의 묘 이장) 시에 대여(大輿, 상여)가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배다리 건설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정조는 이때 다산의 재능을 마음에 두었다가 훗날 수원화성의 기본계획을 맡기게 된다.

사도세자의 융륭(현륭원 (왼쪽))과 정조의 건릉 ⓒ문화재연구소
사도세자의 융륭(현륭원 (왼쪽))과 정조의 건릉 ⓒ문화재연구소

1792년 다산은 부친 정재원이 진주에서 사망하자 충주 선산에 장례 지내고 고향인 남양주 마재(고향)에 여막(廬幕)를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때 다산은 정조의 명을 받고 수원화성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임금에게 보고한다. 보고를 받은 정조는 중국의 선진 과학도서인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주고 거중기를 개발하게 한다. 다산은 축성 관련 여러 도서를 참고하여 거중기를 개발하였다. 당초 수원화성 공사 기간은 10년으로 계획하였으나 정조의 치밀한 사전 준비와 다산이 개발한 거중기 그리고 당대 선진 장비인 유형거와 녹로, 활차 등을 투입하면서 2년 9개월 만에 완공하는 성과를 거둔다. 다산의 자찬묘지명에는 거중기를 투입하여 공사비 4만 량을 줄였다고 적고 있다. 수원화성은 다산과 정조의 합작품이다.

정조의 수원화성 건설 목적은 분명하다. 갑자년(1804년)이 되면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부친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을 살피며 수원화성에서 어머니(혜경궁 홍씨)와 함께 상왕으로 거처하고자 했다. 즉 수원화성은 행궁을 보호하는 시설이며 행궁은 상왕이 거처하는 상왕궁이 된다. 수원화성은 실학을 수용하고 조선과 중국, 일본의 축성술과 기술을 도입하였다. 신도시 수원화성은 한양의 도성과 궁궐 제도를 따랐다. 행궁은 산을 등지고 하천을 앞에 두는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전저후고(前低後高) 지형에 맞춰 지어졌다. 공간 배치는 중국의 주례고공기 궁실 제도에 따라 삼문삼조(三門三朝)의 형식을 따랐다. 또한 홍살문과 금천교, 신풍루, 좌익문, 중양문, 봉수당으로 이어지는 축을 설정하여 궁궐의 법식을 도입하였다.

수원화성과 행궁의 조경 원칙은 ‘진미위적(眞美威敵)’과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이다. 진미위적은 ‘진정한 아름다움은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이며 이는 성곽과 행궁이 장려(壯麗) 하면 감히 적군이라도 훼손할 수 없다는 의미다. 수원화성 축성 이전인 1793년 12월 정조는 조심태와 소견하는 자리에서 ‘성루(城樓)가 웅장하고 화려해서 보는 자로 하여금 기가 꺾이게 하는 것도 성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하여 조경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또 다른 원칙은 ‘검이불루 화이불치’이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의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내용으로 백제 궁궐 정원의 원칙이며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온 우리나라 궁궐 조경의 원칙이 된다. 정조는 수원화성 축성 과정에서 백성을 위한 위민 정책을 추진한다. 역사에 참여한 백성들에게 품삯을 지급하고 털모자와 영양제를 제공하는 등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수원화성은 왕의 정원이며 백성들의 휴식공간이다. 백성들과 같이 상하동락을 실현하고자 했던 정조의 철학이 배어 있는 곳이다.

뎡니의궤 행궁전도(179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뎡니의궤 행궁전도(179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수원화성의 공간구성은 크게 성곽과 행궁 영역으로 구분된다. 행궁의 정원은 담장을 기준으로 안쪽이 내원이며 담장 밖 팔달산 일원이 외원이다. 내원 영역은 행궁의 맨 안쪽으로 외조, 치조, 연조, 후원 중 후원 일원이다. 이곳에 화계와 미로한정이라 편액 한 육각정자가 있고 북쪽으로 창덕궁 후원의 영화당 영역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는 낙남헌 영역이 있다. 낙남헌 일원은 임금이 활을 쏘는 어사대(御射臺)와 군사지휘 목적의 깃대(외간)가 위치하고 정원 요소로 연못과 취병, 판장 등이 도입되었다. 이곳은 정조가 1795년 8일간의 현륭원 원행(성묘) 시 백성을 위해 양로연과 과거를 시행하고 활쏘기 경기를 하는 등 여러 공식적인 행사가 이루진 공간이다.

수원이란 지명은 물과 관련된다. 그래서 수원화성의 정원 요소 중 핵심은 물과 연못이다. 행궁의 정문 앞으로 경복궁, 창덕궁과 같이 북에서 남으로 명당수인 금천이 흐르고 그 중간에 신풍교(금천교)가 자리한다. 수원천은 성곽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동·남·북과 중앙에 연못이 조성되었다. 행궁의 남쪽에 자리하는 수라간(별주) 앞마당에 네모난 방형의 쌍지가 위치하고 성곽의 동쪽과 남쪽에 각각 쌍둥이 연못이 조성되었다. 북쪽으로는 성곽 밖에서 물을 끌어와 조성된 북지가 위치하는데 다른 연못과 달리 하나의 방지로 조성되었다. 정조는 신도시 수원화성을 축조하며 동시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국영농장을 건설한다. 또한 국영농장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석거(북)와 축만제(서), 만년제(남) 등 대규모 저수지를 건설하고 북둔와 서둔이라 명명한 국영농장을 설치하였다. 남쪽에는 만년제를 확대 개축하여 안정된 농업을 위한 수리시설을 구축하였다. 당시의 저수지는 수리시설이자 백성들의 휴식처였다.

정조는 조선시대 식목왕으로 불린다.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 정원 조성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나무 심기 사업을 추진한 정조는 1795년에 다산에게 명하여 그 동안의 나무 식재 내용을 정리하게 한다.

“임금이 유시하기를 ‘7년 동안(1789~1795) 8읍(수원 등)에 식목한 장부책을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로 많으나, 누가 공로가 많은지 심은 나무의 숫자가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명백하지 않으니, 그대는 번잡한 내용은 삭제하고 간략하게 하도록 힘쓸 것이며, 명백한 점만 따라 한 권이 넘지 않게 하라.’ 하셨다.”

정조의 어명을 받은 다산은 7년 동안 12차례 나무 심은 것을 가로에 배열하고, 세로에 8읍을 배치하여 칸마다 그 숫자를 기록하고 총계를 내었다. 그 결과 소나무·홰나무·상수리나무 등 여러 나무들의 총 숫자가 모두 1200만 9772그루였다. 이를 한 장으로 정리하여 정조에게 올리니, 정조는 ‘책 한 권 정도의 분량이 아니면 자세히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더니, 그대가 한 마리 소가 땀을 흘리며 끌 정도로 많은 분량의 내용을 한 장의 종이에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으니 잘했다고 할 만하다.’하며 오랫동안 칭찬하였다. 오늘날 엑셀 서식을 이용한 것이다. 정조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무를 심는다. 만년제와 수원화성 일원에 추가적으로 나무 심기를 진행하는데 이를 고려해 보면 재위 기간 중 150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화성의 조경사적 가치는 매우 크다. 정조와 다산, 채제공, 서유구 등의 역사적 인물이 공존했던 공간으로 역사성이 살아 있다. 당시의 시대상과 정조의 철학, 다산의 실학사상이 배어 있고 성곽 곳곳에 연못과 정자 등 백성을 위한 정원을 조성하여 성곽 전체를 하나의 정원으로 볼 수 있다. 행궁은 정조가 거처할 공간으로 궁궐 조경 양식을 따랐고 그 원형이 잘 복원되어 있다. 특히 외조 공간의 정문(신풍루) 앞의 정승나무는 품(品) 자 형국으로 현존한다. 이는 중국 고전에 나오는 삼정승을 상징하는 나무로 우리 역사상 가장 완벽한 형식과 구도,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정승나무이며 조경사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수목이다.

화성행군 정문과 정승나무(느티나무)
화성행군 정문과 정승나무(느티나무)

행궁 후원인 팔달산 정상에 오르면 동서남북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서장대가 자리한다. 서장대는 군사지휘소이며 전망대로 주변 백 리의 파노라마 경관을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최고의 누각이다. 또 수원화성의 자랑이자 동양 전통정자의 꽃이라 불리는 방화수류정은 신선이 사는 별천지 정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정자 아래에는 원형의 연못, 용연(龍淵)이 조성되어 있다. 이 연못은 여름에는 연꽃이 피는 연지(蓮池)이며 밤에는 보름달과 방화수류정을 담아내는 영지(影池)이다. 그 풍경이 아름답기로 조선 제일이다. 수원화성에는 쌍지가 유명하다. 동지, 남지 모두가 쌍지이며 행궁의 수라간인 별주(別廚) 앞마당에도 쌍지가 존재하였다. 쌍지는 특별한 연못이다.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연못 형태이다. 백제시대 익산의 미륵사지와 부여의 정림사지에 쌍지가 복원되어 있다. 정조는 불생하게 죽임을 당한 부친의 극락왕생을 위해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쌍지를 수원화성에 조성한 것은 아닐까?

방화수류정과 용연 일원
방화수류정과 용연 일원

행궁에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볼 수 있는 시설물이 다수 도입되었다. 행궁 여러 곳에 설치된 살아있는 병풍 취병과 풍년을 기원하는 측우기, 가림막인 판장, 휴식을 위한 방지형 연못 등이다. 후원에는 계단식 화단인 화계와 정자 그리고 여러 종류의 수목이 식재되었다. 이들 조경 양식은 전통적인 우리 고유의 정원 문화이다. 수원화성은 조선 최고의 조경가 정조와 살아생전 팔도의 풍경을 유람하며 곳곳에 정원을 조성한 다산이 공동으로 건설한 왕의 정원이자 백성들의 정원이다. 이제 수원화성에 대한 종합적인 조경사적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고 그 가치를 온 천하에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조경신문]

최재군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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