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 Times] 얼마 전 광릉국립수목원에 근무하는 지인으로부터 첩보가 날아들었다. 빅토리아수련이 곧 대관식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평소 이 여왕님을 가까이에서 알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게다가 이 수련의 개화가 올해 들어 최초라서 몇몇 방송국에서 카메라를 설치했다고 하니 바짝 긴장이 되었다. 이틀에서 사흘만 개화하는 꽃! 흰 봉우리를 유유히 피워 올려 순백의 청량함을 선사하고는 다음날 변신하는 꽃! 빅토리아수련은 처음에 피운 흰빛의 청아한 숙녀의 모습을 벗고 핑크를 거쳐 요염한 진보랏빛 꽃으로 변한다.

그런데 꽃 색깔만 변하는 게 아니다. 흰 꽃일 때는 암술이 도드라진 암꽃이었는데, 붉은 빛을 띠면서 이 꽃은 수꽃으로 변한다. 하루 만에 성전환을 해버린다. 첫날 피어나는 하얀 꽃은 진한 향기와 함께 열기를 발산하여 딱정벌레를 유인한다. 꽃 속에 중매쟁이를 가두어 하룻밤을 지내는데 본인 스스로가 여성이었다가 남성이 되어 버리니, 단 이틀이나 사흘이면 세상에 나온 목적을 확실하게 달성한다. 하여 오랫동안 피어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순백에서 붉은색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화와 변신을 거듭하고 나면 꽃의 임무는 완벽하게 끝난다. 숨죽이며 지켜보는 인간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꽃은 조용히 물속으로 사라진다.

전설로만 듣던 이 꽃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중하러 열 일 제치고 수목원에 예약을 해두었다. 하지만 여왕께서는 수줍음을 타시는지 아님 아무한테나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건지 예상을 깨고 전날 밤에 피어나 나의 방문을 차단해 버렸다. 그렇지, 아무나 그런 호사를 누리는 게 아니다. 2호 여왕님도 기대했으나 역시나 나의 시간을 비껴가고, 결국엔 책임감 가득한 지인의 친절한 현장중계 사진으로 감동했다. 빅토리아수련이 누구던가? 여름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여왕의 대관식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와 밤을 세워 새벽까지 북적이고, 심지어는 사진촬영을 위한 명당싸움까지 벌어진다는 그 꽃이 아닌가!

순백의 청아한 빅토리아 수련의 자태(왼쪽), 진보라빛 꽃은 대관식을 마치고 왕좌에서 미련 없이 내려온다. ⓒ윤인호 국립광릉수목원
순백의 청아한 빅토리아 수련의 자태(왼쪽), 진보라빛 꽃은 대관식을 마치고 왕좌에서 미련 없이 내려온다. ⓒ윤인호 국립광릉수목원

빅토리아 수련의 아쉬움을 달랠 겸 서울식물원을 찾았다. 마곡에 위치한 서울식물원 주제원은 2019년 5월에 개장했다. 많은 시민들을 반기려는 커다란 시설들이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비어있는 모습은 보기에 짠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식물원을 둘러보니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서울식물원 온실은 지중해와 열대기후 환경을 바탕으로 독특한 식물문화를 발전시킨 세계 12개 도시 정원이 담겨있다. 이 정원 중 나의 마음을 확 잡아 끈 것은 식충식물 전시관이었다. 육식・초식을 골라서 하는 그 유명한 네펜데스가 줄기 끝에서 화려한 통을 열어놓고 있었고 끈끈이귀개속, 벌레잡이풀속, 파리지옥속 등 각종 사냥꾼식물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이들이 과연 식물일지 동물일지 아리송하다. 사실 동물과 식물로 분류한 것도 사람들의 기준이니, 식물보고 움직이지 못하고 이동 못하는 종류라고 말하면 식물이 화를 낼 수도 있겠다.

더구나 식충식물은 동물만큼, 아니 육식동물보다 더 기민하고 용맹한 면이 있으니 이들을 상대할 때는 사람이라도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식충식물은 토양이 산성이거나 너무 습한 경우에는 질소와 인 성분의 부족을 감지한다. 이들은 질소와 인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세 단계 방법을 활용한다. 먼저 곤충을 유인할 덫을 둔다. 그리고 먹잇감이 걸려들면 소화효소를 분비한다. 다음으로 영양소와 소화된 액체를 다시 흡수한다. 이러한 세 단계를 거쳐서 부족한 원소를 보충한다.

파리지옥속 식물에 남아있는 곤충의 잔해
파리지옥속 식물에 남아있는 곤충의 잔해

그런데 이 세 가지 단계를 자기 힘으로 다 감당하지 못하는 식물들도 있다. 그들은 다른 생명체의 도움을 받는다. 식물은 본디 남의 조력을 아주 잘 활용하는 존재들이니까. 끈끈이양지꽃은 곤충을 능숙하게 사냥한다. 잎과 줄기의 조직에서 끈끈한 물질을 내어 곤충을 잡는다. 하지만 이 식물은 소화효소는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특정한 미생물을 활용하여 먹이를 소화한다.

식충식물 중에는 범죄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종류도 있다. 브라질의 열대초원에 사는 필콕시아속 식물은 곤충사냥의 대가지만 소화되고 남은 곤충의 찌꺼기는 전혀 남기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건 필살의 무기인, 곤충을 유인하는 잎이 땅 속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식물이 사냥꾼이라는 건 오직 전문가만 알아볼 수 있겠다.

우리가 즐겨먹는 냉이도 알고 보면 무자비한 사냥꾼이다. 냉이는 싹을 키우기 위해 싹이 나오기 직전에 씨앗 껍질로 물을 잔뜩 빨아들인다. 이때 만들어지는 화학물질은 땅 속에 사는 선충류와 특정 단세포생물들을 유인한다. 이들이 꾸역꾸역 몰려들면 냉이는 독소를 분비하여 가차 없이 살해하고 사체를 분해해 줄 소화효소를 낸다. 이 희생제물들로부터 아미노산과 질소를 흡수하여 씨앗은 어린 싹을 키운다.

식충식물의 사냥 장면 중 압권인 것은 변신의 귀재인 방패잎 트리피오필룸일 것이다. 이들은 서아프리카 열대 우림의 떨기나무 아래에서 사는데 우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느닷없이 붉은 색 포충엽을 만든다. 이 포충엽은 줄기를 빙 둘러서 돋은 붉은 혹인데 이 혹들이 바로 곤충을 잡는 끈끈이 역할을 한다. 평소 대기상태일 때는 끈끈한 물질만 분비하고 있다가 포충엽에 곤충이 오면 소화효소 분비샘을 낸다. 이 식물은 몸속에 영양분이 충분히 쌓일 때까지 몇 주 동안이나 이런 방식으로 곤충을 사냥한다.

그리고 곤충에서 흡수한 양분으로 잎사귀 끝에 갈고리를 만들어 주변의 가장 키 큰 식물을 타고서 위로 뻗어 올라간다.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하여 영양분이 축적되면 사냥은 끝내고 뿌리로만 양분을 흡수하는 얌전한 식물로 돌아간다. 이들은 우기가 올 때쯤엔 사냥을 즐기고 사냥이 끝나면 양분을 모아 평범한 식물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그러니까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처럼 선과 악(?)을 오가는 식물이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자신의 삶의 방식을 자유자재로 바꾼다.

이렇게 전설적인 식충식물들을 만나면 삼복더위에 납량특집이 따로 없다. 이들은 날래고 치밀한 사냥의 물귀신들이 아닌가! 서울식물원 주제원 온실은 정말 뜨거웠다. 온실의 구조상 문도 꼭꼭 닫혀있으니 덥고 습한 사우나실이었다. 그래도 그립던 식물들을 만나니 이산가족 상봉한 것 마냥 즐거웠다. 빅토리아 여왕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도 많이 가셨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식물의 변신이야말로 무죄 아닐까?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의 목적과 임무를 수행하려는 그들의 치열한 전략은 여성과 남성의 경계선을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식물과 동물의 분단선을 자유롭게 넘나들기도 한다. 다른 생명체들은 넘볼 수 없는 재주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욕구가 충족되면 미련 없이 세상과 결별하거나 삶의 방식을 바꿔 버린다. 이 치열함과 단호함이 식물의 매력이 아닐까? 나도 할 수 있다면 한 번은 따라 해보고 싶다.

[한국조경신문]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