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시대] 한국 정원 세계화, 어디까지 와 있나
[조경시대] 한국 정원 세계화, 어디까지 와 있나
  • 박원순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21.06.03
  • 호수 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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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scape Times] 미국 유학 시절, 마치 책을 읽듯 하나하나의 정원을 정독해 가면서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궁금증이 생겨난 적이 있었다. 많은 공공 정원들에서 일본 정원을 볼 수 있는데, 왜 한국 정원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정원의 세계화를 놓고 한일전을 펼친 것이라면 지금까지는 분명히 완패한 느낌이었다. 일찍부터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과 문물을 주고받은 결과이겠지만 미국과 유럽에서 일본 정원의 인기는 그 뿌리도 깊고 확실한 팬덤이 형성되어 있는 듯 보였다. 일본 정원은 고요하고 정적이며 상징적인 분위기로 서양 문화권에서 동양 정원 미학에 대한 대표성을 갖게 된 듯 보인다. 특히 고산수 정원, 다실(茶室)과 다원(茶院)을 갖춘 차 문화의 접목,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 정원, 이끼 정원, 분재 등 일본 정원 하면 금세 떠오르는 요소들에 대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것이다. 어쩌면 고흐도 반하게 만든 19세기 일본 미술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적 영향이 근대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일본 정원이 많이 만들어지게 된 단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일본 전통 정원은 아주 오래 전 한국 전통 정원의 조원 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찍이 백제의 노자공(路子工)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수미산(須彌山)을 최초로 일본에 축조하여 정원을 조성한 바 있다. 돌과 흙을 쌓아 산처럼 만들고 수력학을 적용하여 물을 담아 흐를 수 있도록 만든 수미산은 섬세한 감각과 경험, 고도의 기술력의 산물이었다. 분재(盆栽) 역시 원래는 2000년 전 중국에서 시작된 것이 1300년경 일본에 전파된 후 근현대를 거치며 일본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무려 700년이나 더 늦게 분재를 시작했다. 하지만 세계인들은 오늘날 분재 하면 일본을 떠올리고, 세계 공통어로 분재를 일컫는 영어 이름도 일본어 발음을 딴 본사이(Bonsai)라고 불린다.

세계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한국, 중국, 일본은 거의 비슷한 이미지로 뭉뚱그려져 있고, 정원 분야에 있어서는 가장 잘 알려진 일본 양식이 대표성을 띠고 있는 게 현실이다. 외국 사람들은 잘 구별을 못하지만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다른 만큼, 세 나라의 정원 양식도 그러하다. 다만 일본 정원이 먼저 세계에 잘 알려지게 된 기회를 가졌을 뿐이고, 한국 정원도 앞으로 얼마든지 그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최근 몇 년 간 전 세계적으로 음악과 영화, 드라마 등 분야에서 무섭게 일고 있는 한류 열풍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잘 살펴봐야 할 것은, 이렇게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 아이템들이 처음부터 세계화를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최근 빌보드 어워즈 4관왕을 수상한 BTS의 활약은 가사도 전면 영어를 사용하며 세계적 팬덤 형성을 목표로 전략적으로 기획된 것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한류 열풍은 그간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탄탄하게 쌓아온 참신한 콘텐츠 기획력과 그에 수반되는 역량과 기술이 국내 인기를 넘어 해외까지 알려지게 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정원의 경우도, 외국에 무작정 한국 정원을 알리려는 노력을 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나라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정원과 정원 문화를 개척해 갈 필요가 있다.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치가 큰 전통 정원들을 제대로 고증하여 복원하고 그 가치에 대한 대중화와 체계적인 스토리텔링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원은 식물이 주가 되는 공간이므로, 건축물과 오브제에만 치중하는 관행을 넘어 그 정원 안에서 가꾸어졌던 식물들을 제대로 복원하고 그에 수반되었던 원예 기술들도 무형 문화재처럼 보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간 한국 정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루어져 왔지만, 그 전에 우리나라 안에서 그 가치에 대한 발굴과 확산, 내재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감이 있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준비한다면, 분명히 한국 정원이 가진 매력은 세계적으로 퍼져나갈 만한 잠재력이 충분하다.

첫째, 궁궐 정원은 방지원도형 연못과 정자, 화계를 중심으로 정형화된 틀과 자연스러운 식재가 조화를 이루는 한국 정원의 독특한 형태로 발전시킬 수 있다. 어설픈 파격과 변신을 바탕으로 한 현대적 재해석보다는 원래의 고증을 중심으로 한 정확한 재현이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다. 그간 아쉬웠던 것은 디테일한 부분에서 이러한 한국 전통 정원의 구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자와 연못, 화계는 식상하리만치 한국 정원에 반드시 등장하는 요소지만, 아름답고 풍성하고 다양한 우리 식물들과 함께 감동적으로 복원, 연출된 사례를 보기는 쉽지 않았다. 국내 실정이 이럴진대, 해외 사례는 말해 무엇할까.

둘째, 별서 정원을 중심으로 생태적 자연주의 정원이 가진 가치이다. 궁궐 정원 양식이 마치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정원과 같은 한국 정원의 권위와 압도적 규모를 보여 준다면, 크고 작은 다양한 자연환경에 구현이 가능한 별서 정원은 보다 대중적이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진정한 한국 정원(K-Garden)의 매력을 보여 줄 수 있다. ‘소쇄원 48영’과 같이 정원의 장면 장면마다 문학적 사유를 가미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음미하는 정원 양식은 다른 나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수준 높은 것이다.

셋째, 한국의 식물 자원이 가진 잠재력이다. 이 부분은 어쩌면 앞으로 한국 정원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너무 외형적인 하드웨어와 문화적인 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그 내용이 되어야 하는 우리 식물들에 대한 체계적인 정립, 원예기술의 개발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원에 사용되는 식물의 높낮이가 중요하다. 일률적으로 똑같은 규격의 묘목들을 키 맞추어 심는 것은 우리 스타일이 아니다. 다양한 식물들의 자연스러운 혼식, 어쩌면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을 통해 일어났던 코티지 가든(cottage garden) 열풍의 핵심적인 개념을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정원엔 개화기가 서로 다르고, 다양한 색감과 질감을 가진 관목류, 숙근초류가 곳곳에 식재되어 언제나 볼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서양의 정원처럼 과하지는 않았다. 한국 정원의 공간엔 늘 바람과 햇빛이 골고루 퍼져 숨쉴 수 있는 여백이 있었고 그러한 자연스러움은 그 공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위안을 주었다. 의도된 여백과 방치된 여백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정원을 조성해 놓고 잡풀과 흙이 그대로 노출되어 방치된 부분은 우리 전통 정원의 단아하고 품격 있는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오솔길 사이사이 섬세하게 식재된 다양한 식물들은 의도된 여백을 사이에 두고 계절마다 소박하게 피어나 정원을 소요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을 것이다. 영국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던 와일드 가든(wild garden) 또는 우드랜드 가든(woodland garden)의 원조가 바로 우리나라 별서 정원 숲길에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느껴도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전통 정원 고유의 문화를 대중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사극 등 드라마와 노래, 영화는 엄청난 한류 붐을 일으키는데 앞으로 정원 분야에서도 콘텐츠 면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언젠가 워싱턴 디시에 위치한 미국 식물원 기획 전시관에 일본 정원을 주제로 한 특별 전시가 열린 것을 본 적이 있다. 흰 자갈을 깔아 고산수 정원을 표현한 공간에 대나무들이 서 있고 일본식 다다미와 오브제들, 도자기와 분재들이 어우러진 전시는 작은 규모임에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한국 전통 정원에도 이 같은 요소들이 차고 넘쳐난다. 화계와 굴뚝, 담장과 담장 사이 고즈넉한 안뜰과 바깥 계류에서 흘러와 정원을 흐르는 물과 그 소리, 바람이 통하도록 들쇠에 고정하여 열어젖힌 들어걸개문이 있는 정자와 장독대, 우리 누각의 기와와 단청 문양은 또 어떤가.

물론 이 모든 것은 아주 섬세하게 제대로 표현한다는 전제하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까이꺼 뭐 대충’이라는 식으로 만든 것은 감동을 전해 주기 어렵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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