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군 수원시 영통구 녹지공원과장
최재군 수원시 영통구 녹지공원과장

[Landscape Times] 개혁군주 정조대왕이 즉위하기 1년 전인 1775년 잔설(殘雪) 남아 있는 남양주 운길산 산비탈의 천년 고찰 수종사에서 한 청년이 호연지기를 키우고 있었다. 내년이면 성인이 되는 그는 이곳을 자주 찾아와 글을 읽고 심신을 수련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학업에 정진하여 나라에 큰 인물이 되고 세상을 가슴에 품으리라는 다짐을 한다. 한편으로는 조선 팔도의 산수를 유람하는 멋진 인생을 꿈꾸고 있었다. 그가 바로 14살의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천재로 인정받으며 4살에 천자문을 공부하고 7살에 부친이 감탄하는 시를 지었다. 10살 전후로는 삼미집(三眉集)이란 시집을 저술하고 1년 동안 지은 글이 자신의 키 높이나 되었다.

수종사는 신라시대 세워진 가람으로 전해진다. 세월만큼이나 많은 역사를 품고 있는데 세조와 얽힌 이야기는 특별하다. 그는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임금이다. 그래서인지 유독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왕좌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던 세조는 단종을 죽인 다음 해인 1458년 신병 치료차 금강산을 유람하고 북한강을 따라 돌아올 때 두물머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밤이 깊은 시각 운길산 높은 곳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기이하게 생각한 세조는 다음날 종소리가 들려온 운길산을 둘러보게 된다. 이때 폐허가 된 사찰의 동굴에 18나한(깨달음을 얻은 성자)상이 줄지어 앉아 있고 물방울이 떨어져 종소리처럼 들렸다. 세조는 이에 감동하여 그 자리에 절을 복원하게 하고 이름을 수종사(水鍾寺)라 하였다. 1468년 세조가 붕어하자 부인 정희왕후는 죽엽산 남쪽 자락에 세조를 모시고 능호를 광릉이라 했다. 이어 인근에 있던 사찰을 고쳐짓고 죽은 왕의 명복을 비는 조포사(造泡寺), 즉 자복사(資福寺)로 삼고 그 이름을 봉선사(奉先寺)라 했다. 수종사는 봉선사의 말사(末寺)가 된다.

수종사 전경
수종사 전경

다산이 자주 찾은 수종사는 다산의 본가와 십오 리 거리를 두고 남향하고 있다. 다산은 14살 때 수종사에서 시를 짓는데 내용 중에 “나는 장래에 팔도를 유람할 계획이다. 그 시작과 마지막을 수종사에서 하겠노라”며 마음을 다졌다. 한양에 거처하던 다산은 22세가 되던 해에 과거에 합격한다. 그리고 목만중, 오대익, 윤필병 등 친구들과 배를 타고 장구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금의환향했다. 본가가 있는 마재마을로 돌아온 다산은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친구들과 수종사에서 축하연을 베풀었다. 다산은 관직에 몸담고 있던 시절 고향을 찾을 때면 수종사에 들러 잠시나마 마음에 안식을 찾았다. 18년의 긴 유배에서 풀려난 후로도 칠순이 되는 해까지 수종사에서 유유자적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비껴갈 수 없듯이 칠순의 노인이 된 다산은 더 이상 수종사를 오르지 못하게 된다.

수종사는 수많은 시인 묵객과 인연을 맺었다. 다산을 비롯하여 서거정, 이이, 김종직, 이덕형 등이며 그중에 이덕형은 ‘오성(이항복)과 한음(이덕형)’으로 유명한 조선 중기 문신으로 수종사 아랫마을 송촌리에서 별서(별장)를 경영하였다. 현재 한음의 별서는 고목이 된 외로운 은행나무 2주 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산이 강진 유배시절 교류하였던 초의선사 역시 수종사를 찾았다. ‘차의 성인’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는 1830년 다산을 찾아와 수종사에 잠시 머물며 ‘수종사차석옥화상운(水鐘寺次石屋和尙韻) 12수’ 시를 지었다.

삼정헌과 멀리 보이는 마재마을
삼정헌과 멀리 보이는 마재마을

수종사에 오르면 세상을 다 품을 것 같은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수종사에는 조경적으로 감상해야 할 세 가지 풍경이 있다. 첫째는 강 건너 청계산(658m, 양평 소재) 위로 솟아오르는 일출이다. 이는 전통조경에서 경관을 빌려오는 차경기법 중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빌려오는 응시이차(應時而借)’ 기법이다. 두 번째는 삼정헌(三鼎軒) 옆 마당에서 바라보는 다산의 고향 마재마을 풍경으로 ‘파노라마 경관’에 해당된다. 강진의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바라보는 강진만과 유사한 풍경이다. 혹자는 다산이 유배시설 강진만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마지막은 삼정헌(三鼎軒) 다실에서 차를 마시며 바라보는 유리창 밖 풍경이다. 특히 삼정헌 기둥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한다. 잠시나마 다산과 초의선사가 되어 다도(茶道)를 즐길 수 있다. 삼정헌은 차를 무료로 제공하는데 그 값은 각자 알아서 계산한다.

수종사에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는 세조가 하사하여 심었다고 전해진다. 높이가 35m에 달하고 둘레가 6m나 되는 거목으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세월만큼 줄기는 굵고 가지는 거침없이 뻗어 매우 남성적이다. 오랜 세월 살아온 은행나무는 여러 생명을 품고 있다. 어린소나무와 담쟁이 그리고 이름 모를 들풀들이 줄기에서 자라고 있고 온갖 새들과 다람쥐, 청솔모 등의 동물이 은행나무에 기대며 살아간다. 부처님의 자비와 공덕을 베풀고 있는 나무다. 대웅전 계단 좌우에는 파초가 식재되어 있다. 파초는 바나나와 흡사한데 다산이 매우 좋아한 식물이다. 다산은 한양에 거처를 마련하고 초급 관리로 근무하던 시절, 남인 15명으로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때에 자신의 거처 죽란사(竹欄舍) 정원에 파초를 심었고 강진 유배 시절 다산초당의 정원에도 파초를 심고 이를 즐겨 구경하였다.

수종사 은행나무
수종사 은행나무

수종사는 높다란 바위 절벽 위에 처마 밑 제비 집처럼 지어진 사찰이다. 주변은 느티나무, 전나무, 단풍나무, 귀룽나무, 산벚나무 등이 원림을 이루며 뛰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아침 일찍 수종사에 오르면 색다른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삼정헌 옆 넓지 않은 사각형의 마당은 스님의 빗자루에 의해 샌드 아트(sand art) 그림이 그려진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밟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다. 수종사의 가장 높은 곳에 산령각(山靈閣)이 자리한다. 산령각 마당에 서면 수종사와 북한강 두 물 머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바람에 목욕하는 풍욕(風浴)을 할 수 있다. 더불어 뛰어난 경치와 함께 새소리, 바람소리, 풍경소리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수종사의 조경은 화려하지 않다. 다만 곳곳에 야생화와 수목이 식재되어 있고 사찰 주변으로 숲이 둘러져 있어 ‘자연에 점하나 더하는 정원’ 그런 우리의 전통 정원문화를 느낄 수 있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뛰어난 풍경을 자랑하는 수종사는 조경의 시각으로 볼 때 매우 의미 있는 가람이다. 철학가이며 조경가인 다산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런 이유로 2014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109호로 지정되었다.

다산은 전통조경에서 아주 특별한 인물이다. 노량진 월파정, 화순 적벽, 보령 영보정을 비롯하여 팔도의 수많은 정자와 정원을 유람하고 글로 남기었다. 평생 동안 정원 조성에도 남달랐다. 화순 차군정, 예천 반학정, 한양 죽란사, 양평 벽계천의 문암산장, 곡산의 서향묵미각(書香墨味閣)과 고향 초천의 오엽정과 채화정 등 수많은 정원을 조성하였다. 다산은 부가범택(수상가옥)으로 유람하는 것을 꿈꾸었다. 18년의 유배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인생의 꿈을 이룬다. 당호를 산수록재(山水綠齋)라 명명한 수상가옥을 마련하여 춘천, 소양정, 청평사, 화천 등 강물 따라 북한강 일원을 유람하였다. 전통조경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정원과 정자, 역사유적지를 찾아보아야 한다. 필자 역시 다산이 살아생전 유람하며 거닐던 우리 전통정원의 아름다움을 찾아 이제 그 길을 떠나보려 한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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