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시대] 정원이 없으면 건축도 없다
[조경시대] 정원이 없으면 건축도 없다
  • 신지선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21.04.14
  • 호수 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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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선 한국정원문화연구소 월하랑 대표
신지선 한국정원문화연구소 월하랑 대표

[Landscape Times] 정자는 한국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수많은 공간의 주인공이다. 우리는 정자가 없는 한국적 공간을 상상할 수 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위해 동서양 건축 감상법의 차이점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서양은 건축을 조각 작품처럼 감상한다. 건축이 갖는 부피감과 윤곽선이 감상의 주요 대상이며 건물 자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전율을 느낀다. 반면 동양의 건축은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 같다. 선과 선들의 관계 혹은 공백으로 그림이 완성되듯 동양의 건축은 내부와 외부, 자연과 인공 사이 관계의 방식이 공간 원리이다.

(좌측) 파리 노틀담 성당 ⓒ플리커 (우측) 경복궁 흥례문과 북악산의 조화 ⓒ신지선
(좌측) 파리 노틀담 성당 ⓒ플리커 (우측) 경복궁 흥례문과 북악산의 조화 ⓒ신지선

18세기 말 서유구는 건축이 맺는 관계의 방식이 무엇인지 <임원경제지>에 친절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에 따르면, 정자의 종류가 무엇이건, 하나같이 ‘무엇이 보이는 곳에 지어야 하는가’가 그 건축물을 지을 때 유념해야하는 질문이다. 관계를 맺는 주체는 ‘보는 나’와 ‘보이는 경관’이다. ‘보는 나’가 앉아 있는 곳이 정자이고 정자 기둥사이로 보이는 경관이 진정한 주인공이다.

그런데 후손들은 우리 전통 건축을 보통 반대로 경험한다. 개별 건축물들 사이를 오가며 바깥에서 건물을 바라본다. 건물에 들어가 보이는 경관이 어떨지는 상상해볼 뿐이다. 상상하려 애썼다면 그래도 다행이다. 애초에 용도가 그러한 물건을 반대로 쓰고 있으니 본래 뜻을 느끼려해도 불가능하다. 한국 정자는 내부로 들어가 외부를 바라볼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한국 정자는 건축물 자체를 위한 건축이 아니다. 건축물 주변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건축이다.

명옥헌 ⓒ신지선
명옥헌 ⓒ신지선

담양의 명옥헌 원림에는 평평한 못을 따라 배롱나무들이 멋지게 자랐다. 여름이면 배롱나무의 붉은 꽃을 보기 위한 인파의 행렬에 발 디딜 틈이 없다. 정원의 종착지는 역시 전통 정자 명옥헌이다. 나지막한 경사의 정자 뒤를 통해 가운데 방으로 들어선다. 문이 작아 고개를 숙여 몸을 낮췄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무심코 지나온 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완성된 작품이 되어 기다리고 있다.

별생각 없이 정자가 있으니 들어가 한번 앉으려던 나는 갑자기 다른 세계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렀지만, 눈을 통해 들어온 느낌을 사진에 담을 줄 모르는 실력이다. 명옥헌에서 본 정원의 모습은 ‘한국 정원이란 이렇구나’를 강렬하게 느끼게 만든 장소였다.

정원을 걸으며 본 것들이었다. 열 지어 선 배롱나무, 야트막한 언덕, 평평한 물. 별 특별할 것 없는 연출이 명옥헌에서 내려다보니 하나의 작품으로 모아졌다. 호안의 비스듬한 선은 열 지은 배롱나무가 역 V자형으로 무대 뒤를 가득 채우게 했고, 야트막한 언덕은 방에 앉으니 적당한 높이로 정원을 내려다보게 하여 전체 공간을 품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시선의 향을 이루었다. 눈을 아래로 슬며시 내리깔면 사람은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비친 평평한 물에 하늘과 나무가 비친다.

잠잠히 앉아 있으니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잔잔한 파동이 일렁이는 수면과 흠뻑 젖은 배롱나무의 수피는 나의 매력은 이게 다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 작은 공간에서 몇 시간을 머물며 지루할 틈 없이 몇 번을 맘속으로 놀래는 것인지 떠날 땐 흐뭇한 기분마저 느꼈다.

명옥헌 ⓒ신지선
명옥헌 ⓒ신지선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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