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식 목포대 도시및지역개발학과 조교수
정남식 목포대 도시및지역개발학과 조교수

우리사회의 고령화율은 2019년 기준 14.9%로 일본과 함께 가장 빨리 늙어가는 국가가 되어 있다. 농촌사회는 이보다 더 심각하다. 농촌경제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2021년 농촌지역의 고령화율은 44.1%로 예측되고 있어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지역소멸, 마을소멸이라는 용어가 과장이 아닌 실제상황이 될 수 있다. 지역소멸을 화두로 각 지자체의 지역활성화 대책에 대한 고민이 더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소멸 바이러스는 전파력이 강하다. 빈집, 빈상가가 생기기 시작하면 급속도로 주변지역으로 전염된다. 지역소멸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기 위한 여러 대책 중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교류’와 ‘협력’이다.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 대책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회사 업무로 경기도 관내의 한 마을에서 진행하는 추수 행사를 지원한 적이 있었다. 경운기를 운전하며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마을 촌부의 얼굴에서는 스스로 지역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주체의식과 미래를 개척하고자 하는 진지함이 엿보였다. 그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학교에서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도록 철저히 교육받은 나로서는 그들의 진지함이 이해되지 않았고, 사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지는 않다. 프로그램에 투입되는 경비와 인건비, 교류객들에게 받는 참가료 등 수입과 지출을 비교했을 때 굳이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더라도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는 행사임은 자명했다. 그리고 이처럼 경제성 없는 프로그램, 이와 관련된 농촌 지역개발 정책은 20년이 넘도록 전국 곳곳의 지역과 마을에서 지역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책의 비효율성에 대한 사회적 비난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분업’을 통한 ‘대량생산체계’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이다. 같은 노동력을 투입하면서 우리는 분업을 통해 더 많은 잉여를 생산해 낸다. 아버지의 목공기술은 건설회사로, 할머니의 바느질 솜씨는 의류회사로, 감칠맛 나는 어머니의 손맛은 음식업으로 전문화되는 등 우리 사회는 생산성과 효율성에 기반한 분업 시스템에 충실해 왔다. 이러한 체계는 마을과 지역, 국가와 세계를 넘나들며 더욱 탄탄해지고 있고, 동참하지 않는 공동체는 철저히 도태된다. 2021년 현재, 우리는 과거 조상들보다 더 많은 음식과 의복, 집을 소비하고 있다. 분업에 의한 잉여와 전문직 탄생의 결과이다.

조경학을 전공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수많은 필자의 선후배 역시 각자의 전문 직종에서 환경과 생태, 녹지 공간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전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연구, 계획, 설계, 시공, 관리 등의 분야로 구분되어 수많은 정원과 여러 지역의 공원을 디자인한다. 이 생태계 역시 분업이라는 경제 원리에 충실함으로써 구축되었고, 그 덕분에 수많은 기업과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철저히 “합리성”에 기초한 분업체계로 봐야 한다. 재원과 원칙을 정하고 시작하는 이 게임은 매우 생산적이며, 생산된 재화의 품질 역시 우수하다. 그 결과 우리의 정원과 지역의 공원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쾌적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9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공간계획분야에 새로운 방식의 접근방법들이 목격된다. 정해진 시간과 계획해야 하는 공간도 불투명하다. 예산과 규칙도 수시로 변해가는 환경 속에서 계획 아닌 계획을 어렵게 진행하는 일종의 협력적 계획의 형태를 띠고 있다. 원칙이 있다면 지역사회와 교감하면서 계획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전문분야의 탄생이다. 과정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합리적 계획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계획적 사고의 체계가 흔들리는 경험이다. 하지만 계획에 참여하는 지역사회와 주민들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경운기를 운전하던 촌부의 진지함과도 닮았다. 이런 태도는 계획을 어긋나게 할 수도 있고, 구성원이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 매개로 작용할 수도 있다. 결과물은 선명한 사진이 아닌 모자이크 그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매우 비생산적인 방식이다. 반면 그 과정에 참여했던 주체들은 마을과 지역을 대상으로 나름의 치열한 협력게임의 경험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좋은 디자인’이 아닌 ‘주체의 성장’이다.

‘합리적 계획’과 ‘협력적 계획’이라는 용어가 있다. 어떤 계획이든 합리성과 협력성의 이분법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일상적 상식에 기초하여 자유롭게 해석하고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필자 역시 모든 계획에는 양면의 속성이 있음을 인지하고 각 요소의 중요도에 따라 주관적 의견을 개진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합리적 계획이란 전문가와 행정이 주도하는 결과 중심의 계획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으며, 의견수렴을 위한 채널도 존재한다. 결과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방식이기에 산출물의 성과 역시 탁월할 수밖에 없다. 반면 협력적 계획은 기획자나 행정이 아니라 이용자와 지역사회가 주도적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한다. 최종 결과물의 형태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형태로든 지역사회의 사회적 자본 형성을 위한 단초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보통 마을이나 지구 단위 소규모 계획에서는 협력적 계획방식을 채택하며 시·군 단위를 비롯한 광역단위 계획에서는 합리적 계획방식을 채택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합리적 방식이라고 해서 협력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며, 그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의 지자체 단위의 지역개발사업(도시재생뉴딜, 일반농산어촌개발, 특수상황지역개발 등)은 합리적 계획과 협력적 계획 모두에 역량 있는 전문가들을 필요로 한다. 지역개발 과정에서는 합리적 계획의 엔지니어 역할도 중요하지만 협력적 계획의 촉진자 역할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 협력적 계획의 촉진자로 대중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 안에서 합리적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촉진역량이 학습되어 있는가? 이러한 변화는 시대적 요구이다. 수많은 공간정보가 각종 플랫폼에 기록, 관리되고 있으며, 굳이 현장에 가지 않더라도 공간을 분석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전 세계의 정원과 공원의 정보들을 학습한 AI가 우리의 정원과 공원을 나름의 창의력으로 디자인하는 것에 기술적 장벽도 없다. 주거문화가 아파트 평형으로 구분되어 대량생산되는 것처럼 조경의 기술과 창의력의 결과물도 공산품처럼 생산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필요를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고 지역소멸을 극복하고자 하는 지자체들과 중앙부처가 그것을 요구한다. 위기일 수도 있지만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20년이 지난 지금 경운기를 운전하며 아이들을 태우고 다녔던 촌부는 마을 연금 전문가로, 교류객들에게 음식을 담당했던 할머니는 향토음식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마을에는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들어오고 있다. 인구소멸 위기의 마을이 협력적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교류’와 ‘협력’의 백신을 맞은 결과물이다. 더 많은 마을과 지역에 ‘교류’와 ‘협력’의 백신이 퍼지기를 기대한다.

[한국조경신문]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