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 Times] 발랄한 한 미국 청년이 허름한 버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인상적인 영화 <인투 더 와일드(Into The Wild)>를 보았다. 지인의 추천 덕분이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다음 단계로 진입할 인생의 전기에서 청년 크리스는 야생으로 들어갈 결심을 한다. 모아 놓은 전 재산은 기부하고 신분증과 돈도 불태워버리고는 자연의 일부가 되려고 자연으로 향한다. 패기와 순수로 무장한 청년은 도중에 몇몇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고 그들과 우정을 나눈다.

그의 발목을 잡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는 혼자의 야생으로 남는다. 거친 강물을 타다가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들어갔고 수용소에서 신분증을 새로 발급받을 뻔 했지만, 가식으로 물든 문명생활을 경멸하며 다시금 야생으로 향한다. 크리스는 미국의 명문 에머리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아버지는 뛰어난 기술자로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부모님의 거듭되는 불화와 자신과 여동생이 사생아라는 점을 알게 된 후, 세상의 위선에 실망하여 사람들의 세상이 아닌 자연으로 향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는 알래스카에 가기까지 그리고 알래스카에서 생활하는 몇 개월 동안 이런 저런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문명의 한 조각인 버려진 버스 안에서 생활했고 총을 사용하여 작은 동물들을 사냥해 먹었다. 인간이 펼쳐놓은 도시와 문명과 화폐를 경멸했지만 밀농장에서 일꾼으로 일하며 돈을 벌면서 사람들에게서 야생에서 사는 법을 전수받았고, 힘들 때에는 히피 커플과 따뜻한 정을 나누기도 하고 산 속에서 홀로 사는 노인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

주인공은 용감하게 야생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만 여전히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과 문명의 도구들을 필요로 하였다. 강물의 위험과 폭포의 위협, 산악과 야생동물들은 그에게 힘든 환경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모하지만 생기발랄한 젊은이의 하루하루는 감동적이었다. 그의 가출과 모험이 부모님과 기성사회에 대한 반항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젊은 패기를 맘껏 떨치고 나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상상하며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운 좋게 덩치 큰 사슴을 사냥하여 기뻐할 때는 사슴이 불쌍하기도 했지만 굶주린 청년의 편이 되어 보기도 했다.

동물과 식물과 잘 지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야생이다.
동물과 식물과 잘 지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야생이다.

하지만 이 영화 최고의 반전은 급작스런 그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가장 만만하고(?) 연약한 존재인 식물의 급습으로 인한 죽음이었다. 사냥할 동물도 보이지 않고 기아 상태로 접어든 그는 식물도감을 보고 식용할 수 있는 식물을 골라 먹는다. 하지만 자신이 먹은 식물이 식용식물과 비슷하게 생긴 독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몸에 독이 퍼진 상태였다. 험난한 자연과 위험한 동물들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청년은 어이없게도 식물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고야 만다.

외부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도 전혀 없었던 그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S.O.S편지를 써서 버스 문에 붙여 두는 게 최선이었다. 젊은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떠올리면서 은신처인 버스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육신은 다행히도 19일 후에 발견되었고 버스 안에는 사진과 메모 등 기록들이 남아있었다. 무모했지만 용감하기도 했던 크리스의 이야기는 기사화되고 책으로 발간되고 결국에는 영화로 만들어 진다. 데이빗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책을 즐겨 읽던 이 청년이 왜 소로처럼 자연에서의 삶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가 자연의 삶을 꾸리려면 수렵보다는 농경에 의존했어야 했다. 총이 아닌 농기구를 장만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인류가 발전해 온 방식이니까. 채집과 사냥에 의존했던 인류는 시간이 흐르면서 농경과 목축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생산으로 안정적인 생활로 접어든다. 도시 문명에 익숙한 젊은이가 패기 하나를 들고 야생으로 들어간 안타까운 이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자연은 영감의 보고이다.
자연은 영감의 보고이다.

더욱이 마음이 짠한 것은 그가 죽어가면서 그렇게도 기다리던 도움의 손길이 불과 500미터 떨어진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에게 지도만 있었어도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부모는 말없이 사라진 아들을 찾느라 사설탐정을 고용했고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시름시름 꺼져갔다. 하나 뿐인 여동생도 아무 연락이 없는 오빠를 원망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하며 애타게 기다렸다. 주인공이 야생의 삶을 ‘동물처럼’이 아닌 ‘식물처럼’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실천했다면 그의 젊은 날은 데이빗 소로의 이야기처럼 깊고 울림이 있고 충만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가정적 환경과 사회적 현실을 식물처럼 수용하여 부모님을 용서하고 이해하면서 자신의 성장을 도모했다면 그는 아름다운 사과나무로 자라났을 것이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를 보고 난 독자들의 감상은 여러 가지로 나뉜다, 감독이 의도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도 많은 의견이 있다. 야생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처한 환경을 무한긍정하고 그 곳에서 생을 화려하게 피워내는 것, 그것이 야생에 속한 모든 생명체가 하는 일이 아닐까? 그의 행보가 안타까운 것은 마음속의 야생을 만끽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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