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 Times] 새로운 밀레니엄이라며 들떠있던 2000년대 초반, 자연 속에 자리한 국가출연 연구기관에 근무할 때였다. 출근하여 연구실로 들어가는 데 계단에 평범한 거미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방안에 들어왔다면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밖에 있으니 그럴 일은 없었다. 거미는 나를 피하지 않았고 우리는 짧은 순간 대치했다. 그때 어떤 생각이 휙 지나갔다. ‘이 건물이 있는 땅은 본래 거미의 것이었구나!’ 자연과 생태에 별 느낌이 없던 철없는 시절이었다.

어쩌면 거미가 나한테 그 말을 해주었는지 모른다. 잠깐 동안의 거미와의 만남은 내 마음 속에 남았다. 숲과 연못과 정원이 가득한 그 곳에서 항상 그 생각이 났다. 이 후에도 간간이. 이제는 먼 옛 이야기인데도 나는 거미와의 마주침을 잊기 힘들다. 20세기 초 미국 뉴욕 주의 작은 마을에 책이나 학교보다 숲에 매료된 소년이 있었다. 시간만 나면 숲을 쏘다니며 몇 시간이고 나무둥치에 기대어 동물들을 관찰하는 게 일이었다. 주말에는 하이킹이 일과였다. 머리 위로 날아오르는 새들은 지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의 언어는 육중한 울림을 주어 소년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소년은 소리만 들어도 무슨 새인지 구별할 수 있고 새들과 화답하게 되었다. 이 소년은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코넬대학 조류학과로 진학한다. 그 곳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앨런 교수의 도움으로 조사와 실험을 반복하며 새 연구에 집중한다. 스승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제자들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교실을 숙소로 제공하는 분이었다. 이 청년, 제임스 태너는 스승의 인정으로 사라져가는 새, 흰부리딱따구리 탐사대의 일원이 된다. 그가 이 팀에 뽑힌 것은 어릴 적 숲의 체험이 원인이 었다.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동물들을 기다리고 관찰하는 인내심과 숲과 야생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식물과 동물과 인간은 서로가 서로의 보금자리여야 한다.
식물과 동물과 인간은 서로가 서로의 보금자리여야 한다.

흰부리딱따구리는 그 독특한 아름다움과 강렬한 매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포획감이 되어왔다. 1924년에 조류학자들은 이 새가 이미 멸종했을 거라고 걱정했다. 흰 부리와 붉은 볏, 검은 색과 흰색의 날렵한 몸통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노랫소리도 특이해서 깊은 숲에 들어서면 쉽게 눈에 띄는 새였다. 19세기 말 여성들의 모자에 새의 깃털 장식이 얹히거나 새를 통째로 올리는 유행 덕분에 죄 없는 새들이 수난을 겪었을 때 이 새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참하게 포획되는 새들을 보다 못한 사람들이 조류보호협회를 만들었지만 새의 운명은 미지수였다. 제임스 태너는 미국 남부에서 이 새를 찾아 헤매며 관찰하는 데 젊은 날을 보낸다. 늑대와 악어, 독뱀과 모기의 위험을 감수하고 노력한 끝에 그는 흰부리딱따구리 전문가가 되고 이 새를 보호하여 멸종을 막는 제안을 한다. 다른 새들처럼 흰부리딱따구리의 운명 또한 숲과 하나였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나무들이 앞다투어 남획되면서 새는 터전과 먹잇감을 잃어갔다.

수백 년 자란 신성한 나무들이 몇 분안에 도륙되어 통나무가 되었고 각종 나무제품이 되러 속속 숲을 떠났다. 태너와 조류보호협회가 숲과 새를 보호하려고 법률제정을 위한 마지막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 설상가상, 인간들의 욕망 대충돌인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전쟁은 자연과 새와 숲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조달하려고 나무들은 더 많이 더 빨리 베였고 흰부리딱따구리는 이제 영원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진 숲의 왕을 찾아서(돌베개, 2015)>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새를 보호하고 지키려했던 사람들의 헌신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다른 종을 위한 마음이 따뜻하다.

근엄하고 당당한 자태로 숲의 왕의 위엄을 보여주었던 이 새는 이제 전설과 신화가 되었다. 인간에게 잡혀 호텔방에 끌려와서도 탈출을 위해 단숨에 시멘트벽에 구멍을 내고 인간이 주는 먹이를 끝까지 거부한 채 장군처럼 장렬하게 스러졌던 숲의 왕은 이제 표본과 사진과 녹음 파일로만 남았다. 한 때 이 새는 1미터 가량의 날개로 힘차게 비행하다가 순간적으로 내려앉아 나무에 강한 발톱을 박는 모습을 보여주어 사람들이 ‘하느님 맙소사(Lord God Bird)!’ 라는 별명을 지어줄 정도의 야성적이고 인상적인 새였다.

우리는 누구나 자연을 빌려 쓴다.
우리는 누구나 자연을 빌려 쓴다.

죽은 큰 나무에 둥지를 틀고 굼벵이만 찾아먹는 까다로운 식성을 바꾸지 않은 이 숲의 왕은 인간의 무한한 욕심과 생명에 대한 무감각과 무지로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인간은 침팬지와만 친척이 아니다. 지구상 생명체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 인간 태아의 발생과 분열과정을 보면 여러 단계에서 어류, 조류등 다른 종들과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구라는 모체에는 식물을 자궁으로 하여 별별 생명체들이 살아간다. 산 나무에 기대어 사는 종은 말할 것도 없고 생물체의 5분의 1(약 6000여 종)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산다. 인간도 전적으로 나무와 식물에 의지하여 산다. 그래서 지구상 모든 생물종은 우리 인간의 친척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산다.

거미의 땅과 새의 나무를 우리는 모두 강탈했다. 우리 터전인 숲과 지구는 무지한 인간이라는 종 때문에 기형이 되어간다. 이제는 침략과 약탈을 멈추자. 친척들을 보듬어 함께 살아갈 때이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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