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br>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Landscape Times] 늦은 듯 하지만 기다렸던 첫눈이 왔다. 사람들만 첫눈을 기다린 게 아니었다. 나무들도 눈을 만나려 가을부터 서둘러 옷을 훌훌 벗었다. 사람들이 잔뜩 껴입고 눈을 만난다면 나무들은 모두 벗고 눈과 만난다. 눈과의 만남 또한 나무 생의 재미이다. 빗물은 서둘러 땅으로 향하지만 눈송이는 얼마간 둥치와 가지에 머무른다. 얼마 전 잎들을 떠나보낸 가지들이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고 있던 중 기다리던 손님들이 찾아왔다. 가지를 떠난 잎들은 땅위에 내려 앉아 눈과 비벼가며 다음 세대를 위한 거름이 되어갈 것이다.

가지들은 세 개의 계절을 함께하곤 떠나간 잎들을 내려다보며 이제 막 놀러온 눈과 이야기를 나눈다. 눈은 온 지구 구석구석을 돌아들어 숲의 이야기, 빌딩의 이야기, 지하세상의 이야기를 모아 왔다. 겨울나무가 흐뭇해지는 시간이다. 누가 ‘외로운 겨울나무’라고 했을까? 잎은 잎대로 가지는 가지대로 뿌리는 뿌리대로 휴식과 친교의 마당이 펼쳐지는 게 겨울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가을에서 겨울의 기간은 수확과 정리, 휴식과 만남의 풍성하고 정겨운 날들이다. 물론 사람들이 이런 시기를 즐기려면 조건이 있다.

가을 단풍은 보조색소(카로티노이드)의 존재를 드러낸다. ⓒ최문형
가을 단풍은 보조색소(카로티노이드)의 존재를 드러낸다. ⓒ최문형

바로 나무처럼 식물처럼 살아야 한다. 나무처럼 묵묵히 부지런히 할 일을 하고 어떤 아픔과 손실이 있어도 이기고 살고 부당해도 불평하기 보단 견디며 사는 시간들이 전제된다. 가을은 영글고 베고 별리하는 때이다. 열매가 익고 씨앗이 여물어 때가 되면 훌훌 떠난다. 가을은 감추었던 속내를 보이는 시기이다. 푸른 잎의 주범(?)인 엽록소 뒤에 숨겨졌던 보조색소들이 전방에 나서며 이별과 여행의 시간이 펼쳐진다. 노랑과 빨강은 이파리의 이면이다. 우리는 이 색깔들을 즐긴다.

변화는 신선하다. 초록으로만 있던 잎들이 다채로운 색으로 우리를 놀래 킨다. 그렇다! 인생의 가을을 제대로 살려면 우리도 그렇게 움직여야 한다. 달라져야 한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면서 필요한 게 바뀐다. 친구도 달라진다. 생각도 달라진다. 살아가는 모습도 우선순위도 바뀐다. 초록에 가렸던 노랑과 빨강의 보조색소들이 전면에 튀어 나온다. 일하느라 바빠서 뒤로 미뤘던 소망과 꿈들이 솔솔 올라온다. 자, 이제 시작이다. 숨어 있던 본 모습을 드러내며 여행을 떠날 시기이다.

이게 가을이다. 언제보다 활발하게 누구보다 멋지게 일탈(?)을 한다. 잎들은 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옆 가지에 부딪쳐 보고 다른 잎들과 포옹도 한다. 땅위의 풀들과 탱고도 추어보고 사람들이 다니는 도로 위에서 계주도 펼쳐본다. 다른 나무의 잎들과 서로 뭉쳐 군무를 춘다. 호기심에 그들에게 놀러온 새들과 동물들과도 다채로운 축제를 벌인다. 그러다가 지치면 누군가의 거름이 되어주기 위해 긴 잠에도 빠져 본다.

겨울나무는 놀러온 눈과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김남원
겨울나무는 놀러온 눈과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김남원

사람들도 이런 가을이 어떨까? 중년을 넘어 가을로 들어오면 마음과 몸의 많은 변화를 본다. 섭섭하기도 서글플 수도 있다. 느낌과 생각이 달라지다보면 이런저런 고민에 들어간다. 봄여름에 비교하면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되돌리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만 그건 자연스럽지 않다. 나무와 식물이 가을을 회피하고 싫어하지 않듯 가을을 맞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에세이’의 창시자 몽테뉴는 ‘수상록’에 다음의 말을 남겼다. “사건들은 바람처럼 휘몰아쳐 제멋대로 우리를 끌고 간다. 우리가 불안정한 태도로 흔들리면 혼란에 빠진다. 내가 나를 여러 가지로 묘사한다면 그것은 내가 자신을 여러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부끄러워하고 오만하고, 정숙하고 호색하고, 수다스럽고 소심하고, 드세고 연약하고, 영악하고 멍청하고, 울적하고 쾌활하고, 박학하고 무식하고, 거짓말하고 정직하고, 인색하고 낭비하는 이 모든 것으로. 나는 내가 어느 시점에 있는지 그대로 알아본다. 누구든 자신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사람은 자기 속에 이런 모순과 충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몽테뉴가 말한 ‘어느 시점’은 시시각각일 수도 있고 인생의 각개 계절일 수 있다. 그는 남들보다 좀 이른 시기에 가을로 들어갔다. 공직을 접고 은퇴한 후 자신의 성으로 돌아와 작은 다락방에서 내면에 숨겨진 갖가지 ‘보조색소’들을 찾으며 열매를 숙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면으로 여행해 들어갔다. 무려 20여년이었다. 그의 가을과 겨울은 풍성한 성찰들로 점철되어 많은 이들의 거름이 되었다. 그는 나무처럼 살았다.

우리는 우리의 가을을 준비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겨울을 즐길 의무가 있다. 가을에서 겨울은 봄에서 여름과는 영 다르다. 외면도 내면도 환경도 모두 변했다. 이제 화려한 가을 겨울을 즐기자.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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