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br>
고정희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Landscape Times]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날의 연속이다. 벌써 8개월째 모든 행사와 미팅이 온라인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친구들 실물 본지도 오래된 데다가 5월부터 기대했던 고국 방문길도 끊겨 시름에 잠겨 있던 중 베네치아에 사는 온라인 친구가 반가운 이메일을 한 통 보내 왔다. 내가 부탁했던 일을 알아보기 위해 ‘산 프란체스코 델라 비냐 수도원’의 사제와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사제가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니 다녀가지 않겠는가. 솔깃했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 베네치아 여행이 가당한 일일까. 그러면서도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기차에 올랐다. 베를린에서 뮌헨을 거쳐 알프스를 넘고 돌로미티산맥을 등진 채 끝도 없이 펼쳐지는 베네토 계곡의 포도밭 풍경을 지나 꼬박 13시간 만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산프란체스코 델라 비냐 수도원 정원은 모두 포도밭이다. ©고정희
산프란체스코 델라 비냐 수도원 정원은 모두 포도밭이다. ©고정희

내년이면 고정희의 중세정원 이야기 1편이 출판된 지 십 년이 된다. 독자들에게 2편을 쓰겠다고 약속한 지도 십 년이 된다. 그러므로 더 미루지 않고 2편을 낼 생각으로 준비 중이다. 2편은 중세의 도시 정원에 관해서 쓰리라 예고했었다. 그런데 중세 유럽에 흥미로운 도시가 너무 많았던 관계로 오랫동안 도시 선정을 못 한 채 뭉그적댔다. 암스테르담, 안트베르펜, 브뤼허, 함부르크, 뤼벡, 뉘른베르크, 아욱스부르크 등의 도시들을 들어 보았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모두 쟁쟁한 도시들이었지만 정작 보여줄 수 있는 중세정원의 자취는 빈약했다. 베네치아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기는 했다. 중세에 가장 막강했던 도시 베네치아. 크고 작은 60여 개의 작은 섬을 수백의 수로로 묶어 태어난 도시. 수로와 수로 사이에 스스로 가둔 관계로 중세 이후 도시 구조가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은 커다란 장점이다. 그러나 베네치아 어디에서 정원을 찾는단 말인가. 게다가 관광객이 들끓는 퇴폐적인 도시라는 편견에 사로잡혔던 까닭에 발길을 하지 않았었다. 8년 전 정말 우연히 베네치아에 은밀하게 숨겨진 정원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호텔 정원에서도 덩굴장미와 포도밭이 마주 보고 있으며 채소와 허브밭이 있다. 여기서 수확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메뉴에 넣고, 채소와 허브는 식당 주방에서 곧장 조리한다고 한다. © 고정희
호텔 정원에서도 덩굴장미와 포도밭이 마주 보고 있으며 채소와 허브밭이 있다. 여기서 수확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메뉴에 넣고, 채소와 허브는 식당 주방에서 곧장 조리한다고 한다. ©고정희

그때 베네치아를 무대로 삼은 소설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지금의 베네치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매우 세밀한 필치로 묘사한 소설인데 그들의 삶은 결코 화려하지도 퇴폐적이지도 않고 세상의 모든 서민처럼 하루하루 진지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듯했다. 그들이 매일 해 먹는 음식도 자주 묘사되어 요리를 좋아하는 나의 관심이 깨어났다. 그러다 주인공의 장모가 손자 손녀의 안부를 묻는 대목이 나왔다. “아이들은 건강히 잘 자라고 있나?” “네, 잘 자라고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여느 장모와 사위 사이의 대화와 다르지 않았다. 다음 질문, “아이들이 밥은 잘 먹나?” 역시 세계 할머니들의 공통 관심사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 할머니라면 다음에는 틀림없이, “공부는 열심히 하고?” 물을 것이라 여기면서 다음 문장을 읽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들이 하루에 신선한 채소를 두 가지 이상 꼭 먹겠지?”였다.

담장 뒤에 숨겨진 정원. 이런 장면을 무수히 만날 수 있다. ©고정희
담장 뒤에 숨겨진 정원. 이런 장면을 무수히 만날 수 있다. ©고정희

알고 보니 베네치아에 채소요리가 상당히 많을 뿐 아니라 그 전통이 꽤 오래되었다고 한다. 베네치아의 가지요리와 아티초크 요리는 유명하다. 그런데 채소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육지에서 매일 공수해 오나? 지금은 그렇다고 해도 천여 년 전, 석호의 늪지 섬에 어렵사리 자리 잡고 살았던 초기 베네치아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물고기만 먹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베네치아를 보면 텃밭 한 뙈기 자리 잡을 곳도 없어 보인다. 천여 년 전에는 달랐을 것이다. 물고기와 소금을 배에 싣고 육지로 가서 곡식과 채소로 바꿔 먹었다 해도 노를 저어서 돌아오는 동안 채소가 과연 신선하게 유지되었을까? 그것도 매일매일? 아닐 것이다. 늪지 섬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개간해서 텃밭을 일구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정원의 시작이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방을 싸서 베네치아로 향했다. 8년 전 나의 베네치아 정원 오디세이는 이렇게 무작정 시작되었다. 100장면을 쓰느라고 한 때 멈췄던 발길을 이제 다시 떼게 된 것은 코로나 덕이었다. 관광객이 사라진 뒤 수도원 사제가 시간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담장 뒤에 숨겨진 정원. 이런 장면을 무수히 만날 수 있다. ©고정희
담장 뒤에 숨겨진 정원. 이런 장면을 무수히 만날 수 있다. ©고정희

현재 베네치아에 약 5백 개의 정원이 있다고 한다. 모두 높은 담장 뒤에 꼭꼭 숨어있어 비밀의 정원이라고도 부른다. 담장 뒤에 숨겨둔 까닭은 매일 좁은 운하로 밀고 들어오는 밀물과 해마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덮치는 홍수로부터 정원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굳이 감추려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밖에서 볼 수 없기에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솔직히 누가 정원을 보러 베네치아에 간단 말인가. 암튼 거의 모두 개인 정원이기 때문에 방문을 하려면 사전에 연락을 취해서 약속을 잡아야 한다. 이리저리 조사하던 중에 베네치아 출신으로 정원에 조예가 깊은 어느 여인이 쓴 글을 여러 편 읽게 되었다. 로레다나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그동안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온라인 친구가 되었고 이번에 <산 프란체스코 델라 비냐> 수도원과 연계해 준 것이다. 그 외에도 수녀들이 운영하는 요양원 정원 두 곳을 방문할 수 있게 조치해 두었다고 했다. 수도원 정원에 대해서는 1편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더 얘기할 생각은 없지만, 길을 돌아서라도 베네치아 정원의 본질에 도달하고 싶었다.

위의 세 곳뿐 아니라 여러 곳을 보고 돌아왔다. 8년 전 첫 여행 뒤에 나름대로 조사해 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사람들의 미적 감각이 남다르다는 것은 도시를 보면 알 수 있다. 한때 상권으로 세상을 제패했던 사람들이다. 그 유전자 덕에 매우 실질적이기도 하다. 그들의 정원 역시 그렇다. 베네치아의 정원은 아름다운 장미와 실용적인 포도나무가 나란히 자라는 곳이다. 장미를 심는 이유는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미가 포도나무 병해를 미리 알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미보다 와인이 중요한 걸까? 아니라고 한다. 비중이 같다고.

그런데 채소는? 채소섬이라는 곳이 있다. 베네치아 본섬에서 수상버스 13번을 타고 약 삼십 분 동쪽으로 가면 산테라스모라는 커다란 섬이 나타난다. 늦어도 8세기에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는 전용섬이 되었다. 이 섬의 농부들은 지금도 매일 새벽 채소와 과일을 싣고 리알토 장에 나간다. 아이들에게 매일 두 종류 이상의 신선한 채소를 먹일 수 있는 비밀이 여기 숨어있었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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