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Landscape Times]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토끼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우화 속의 토끼가 아니라 실제의 토끼라면 대개 우리에 갇혀있거나 팔자가 좋아 봐야 공원 잔디밭에서 풀을 뜯는 정도일 것이다.

2015년이었던 것 같다. 슈투트가르트의 로젠슈타인 파크를 답사할 때였다. 로젠슈타인 파크는 19세기 초에 조성된 대형 풍경정원이다. 오래된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고 사이사이에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도심 공원이지만 자연인 듯 착각하게 만드는 곳이다.

함께 간 동료들과 산책로를 걸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길옆 수림에서 갑자기 뭔가 총알처럼 튀어나와 넓은 잔디밭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토끼였다. 공원의 토끼는 보기 드문 광경이 아니지만 그리 쏜살같이 달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모두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아무도 카메라를 들이댈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토끼와 거북이라더니 토끼가 저렇게 빠른 동물이었구나. 이후 공원을 산책할 때마다 두리번거리지만 그때의 횡재를 아직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함부르크 국제정원박람회 장의 오리 가족 ©고정희

갑자기 이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은 전화 한 통 때문이다. 며칠 전 건축하는 친구가 전화해서, “혹시 AAD라는 것에 대해 아는 것 있어? 동물을 지원하는 디자인animal aided design이라는데….” 라며 운을 뗐다. “글쎄,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네. 자세히 알아봐 줘?”했더니 그러면 고맙겠다고 한다. 라이프니츠 야생동물 연구소 건물을 증축할 계획인데 조경도 좀 제대로 하고 싶어 인터넷을 뒤져 보니 AAD라는 개념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 친구의 과제는 현상 공모를 내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AAD 방식을 적용하여 디자인하라고 조건을 내걸어도 될지 망설이는 중이라 지원 사격을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라이프니츠 야생동물 연구소라면 작년에 <흰코뿔소 북부 아종>의 인공 수정에 성공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곳이다. 흰코뿔소 자체는 약 2만 마리가 남아있지만 그 중 북부 아종은 세상에 단 두 마리밖에 없기에 큰 화제가 되었었다. 그 생각이 나서 “왜, 흰코뿔소 새끼가 태어나면 연구소 정원에서 기르려고?” 했더니 웃는다. 그게 아니고 야생동물 연구소 조경이니 그래도 뭔가 동물 냄새가 나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AAD 시범 설계-모래 장지뱀 테라스
AAD 시범 설계-모래 장지뱀 테라스

나 역시 궁금하기에 조사하여 친구에게 전해 준 내용은 이러했다. 동물 지원 디자인(AAD)은 2015년에 학계에 처음 나타난 개념이다. 독일 카셀대학 조경학과와 뮌헨대학 동물생태학과에서 공동으로 연구하여 내어놓았다. 요지는 주거단지를 설계할 때 야생동물이 서식하기에 알맞은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도시의 생물종다양성을 높이기 위해서인데 이를 위한 디자인 방법론을 개발한 것이다.

뮌헨과 카셀에서 각각 심포지엄도 개최하여 널리 알리고자 했으나 조경계의 반응은 지금껏 싸늘하다. 그도 그럴 법하다. 우리에 가두지 않은 채로도 주거단지에서 사람과 함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야생동물종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AAD 연구보고서에서 목표종으로 삼은 것을 보면 참새, 딱따구리 등의 조류와 고슴도치, 장지 도마뱀, 박쥐나 호랑나비, 왕벌 등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 이미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인데 디자인의 핵심은 이들이 좀 더 웰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 했다. 우선 종별로 라이프 사이클을 분석하고 먹이와 번식 방법 등을 조사한 뒤 사람의 주거지에서 함께 서식하되 좀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먹고 자고 번식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마지막으로 시범 설계를 통해 해법을 제시했다. 야생동물도 서식지를 분양받거나 임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엄밀히 따지면 독일의 <자연침해조정제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방법론을 빌린 것이다. 사업개발 대상지에 존재하는 동식물 서식지가 파괴되는 경우 사전에 대체 서식지를 마련한 뒤 사업대상지에서 사는 동물을 그곳으로 이주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청개구리 웅덩이가 파괴될 경우 다른 안전한 곳에 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청개구리를 이주시킨 뒤에야 비로소 공사를 시작할 수 있다. 이때 동면기, 산란기, 부화기를 모두 피해야 하므로 계획이 통과되고 나서도 일 년 이상을 기다렸다가 비로소 공사를 시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AAD의 방법론에 따르면 대체 서식지를 마련하는 대신 주거단지에 직접 서식지를 만들겠다는 것인데 이는 자연침해조정의 사전 회피 조치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자연침해조정 절차에 수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슈투트가르트 로젠슈타인 파크, 토끼가 지나간 뒤 ©고정희
슈투트가르트 로젠슈타인 파크, 토끼가 지나간 뒤 ©고정희

설명을 듣고 난 후 친구는 내 견해를 물었다. 자연침해조정 절차를 통해 어차피 해야 할 일을 굳이 현상 공모의 조건으로 내걸 필요는 없어 보인다. 게다가 특정 디자인 방법론을 지정하는 것 자체가 썩 좋은 일이 아니라고 했다. 야생동물 연구소 조경이라고 하면 디자이너들이 알아서 맥락을 끌어낼 것이다. 디자이너들의 창의력을 신뢰하여 어떤 해법을 내어놓는지 기대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종 다양성, 기후변화 적응 등은 조경디자이너들 사이에 이미 상식이 되어 있으니 돌무더기를 쌓아 고슴도치 서식지를 만들어 달라는 식의 요구를 한다면 좋은 디자이너들이 멀리 도망갈 것이라 전했다. 내심 걱정되는 것은 <동물 지원형 디자인>이 한 번 시작되면 너도나도 따라 하다 결국 도그마로 치달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의 생태 파시즘이 그렇게 시작되었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사슴이 자유롭게 뛰놀고 토끼가 질주하는 광경을 상상해 본다. 물론 되지 않는 얘기다. 예전에 오로지 왕족이나 귀족들만이 드넓은 영지에 정원을 만들 수 있었던 시절, 그 모든 것이 가능했었다. 도도한 자태로 잔디밭을 ‘워킹’하는 공작새도 흔한 장면이었다. AAD를 개발한 조경가의 말을 들어보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하다. 누군들 그립지 않을까. 그러나 21세기 아파트 주민들이 누리는 풍경에선 고슴도치와 모래 장지뱀 등 <거동이 불편한> 동물들만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문득 답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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