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마누엘라. 잡초 뽑기 신기록. 비디오 화면 캡처. © SenUVK
마누엘라. 잡초 뽑기 신기록. 비디오 화면 캡처. © SenUVK

이름: 마누엘라. 여성. 사십 대 초반. 용모: 다부지고 씩씩함. 직업: 정원사. 근무처: 베를린 녹지국 공원관리과 고용직. 특기 사항: 기록 보유자. 무슨 기록? 베를린 정원사 중 연간 잡초를 가장 많이 뽑아 나른 기록. 손수레로 420개 분량.

이름: 잉게와 유르겐. 34년 차 부부. 취미: 공원 산책. 특기 사항: 기록보유. 무슨 기록? 그동안 함께 걸은 산책로 총연장 10,800km. 베를린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의 거리에 해당.

프랑크. 베를린 삼림관리팀장. 비디오 화면 캡처. © SenUVK
프랑크. 베를린 삼림관리팀장. 비디오 화면 캡처. © SenUVK

이름: 프랑크. 사십 대 남성. 직업: 삼림 마스터. 근무처: 베를린 삼림청 수목 관리팀장. 특기 사항: 나무 백만 그루 이상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음.

 

위에서 소개한 인물들은 바로 그 비디오의 주인공들이다. 지난 150년 베를린 녹지 행정이 얼마나 멋지게 활약했는지에 대한 자화자찬 대신 공원관리사, 공원 산책의 제왕, 숲관리사 내지는 커뮤니티 정원에서 한 뼘의 텃밭을 가꾸며 행복해하는 할머니와 손자 등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 인상적이다. 현 최고 행정관은 이들을 소개하는 내레이터 역할을 맡아 중간 중간에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퇴장한다. 베를린의 녹지는 베를린 ‘시민들이 스스로 짊어진 책임’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시민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이 아니고 진상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다. 녹지 행정부를 설립한 것도 시민들이었고 녹지 행정을 지금까지 이끌어온 것도 시민들이었다. 시민들이 지켜 낸 40%의 녹지라고 자부심들이 대단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1870년 6월 시의회에서 공원부서의 설립을 결의하고 7월 1일 구스타프 마이어를 초대 부서장으로 임명했다. 구스타프 마이어는 당시 왕실의 정원 총관이었다. 시민대표들이 왕실로부터 정원 총관을 빼앗아 시민공원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다. 독일식 무혈혁명의 시작이라 보아도 좋겠다. 그만큼 왕권이 쇠퇴하고 시민계급의 세력이 커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이 왕으로부터 빼앗은 구스타프 마이어(Gustav Meyer 1816-1877)는 독일 풍경 정원의 마지막 주자로서 베를린 시민공원 제1호, 2호 3호를 차례로 설계한 인물이다. 그가 설계한 트렙토우 공원에는 그의 흉상이 서 있고 포츠담 상수시 정원에는 그가 정원 총관 시절에 거처했던 관사가 아직 남아 있다.

포츠담 샤를로텐 궁전에 위치한 왕실정원총관 관사. © 고정희
포츠담 샤를로텐 궁전에 위치한 왕실정원총관 관사. © 고정희

왕실 정원 총관의 지위가 대단했다는 증거다. 정원이 왕권의 상징이 되었던 후기 르네상스 시대부터 프랑스에서 왕실 정원사 제도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최고의 실력자를 전용 정원사로 채용했고 대를 물리기도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프랑스의 앙드레 르노트르가 바로 이런 케이스였다. 독일의 경우 18세기 프로이센에서 본격적으로 왕실 정원사 제도를 도입했다. 말은 왕실 정원사지만 한 사람만 고용한 것이 아니고 많은 인력으로 구성된 행정 부서로서 4층의 위계가 있었다. 부속시설로는 정원사 학교와 식물재배원을 두었다. 총관의 업무 범위는 지금의 정원사와 조경가의 역할을 합친 것과 같았다. 궁전 정원 외에도 전 영토의 녹지계획 수립의 임무가 주어졌다. 총관은 고위관리 중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정원실습생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다리를 타고 차곡차곡 올라가야 했다. 이렇게 하여 총관이 되면 별장 풍의 관사에서 살았고 하인도 배정받았으며 전용 마차도 있었다. 사후에는 동상도 세워주었다.

이런 얘기를 쓰고 있으면 사실 마음이 별로 편하지 않다. 조선 시대의 정원사는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기 때문이다. 동상, 관사에 전용 마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이름자라도 알려진 정원사가 있었던가? 소쇄원, 독락당 등을 지었던 선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뛰어난 관료체계로 미루어 보아 관리로서 녹을 먹으며 궁궐의 정원을 담당했던 직책이 있었을 텐데 그들이 누구였는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아름다운 창덕궁의 비원은 누가 설계하고 누가 짓고 누가 관리했을까. 문(文)이 하늘 높이 치켜세워지고 공(工)과 예(藝)와 기(技)를 천시했던 사회였으므로 공과 예와 기가 모두 필요했던 정원예술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학교에서도 문자만 가르쳤으므로 무와 기와 예는 알아서 배워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료에 더러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을까.

내가 애지중지하는 책이 한 권 있다. 전영옥 저 <조선시대 도시조경론>이다. 혹시 하는 마음에서 이름을 찾기 위해 다시 펼쳐 보았다. 그중 3장 ‘행정체계’를 보니 조경 관련 사업은 공조에서 총괄했고 업무의 성격에 따라 여러 하위 부서에서 나누어 맡았으며 호조, 예조, 병조에서 지원했다고 한다. 세상을 문관과 무관으로만 분류했던 시대여서 공조(工曹)가 있었다고 하나 공조판서는 분명 문무관이 맡았을 것이다. 정작 공인들은 하급 관료직이나 얻어 가지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67쪽에 당시 조경 행정 구조에 대한 다이어그램까지 나와 있다. 짐작했던 바와 같이 조경 전담 부서는 없었다. 4장 ‘인력구성’에서 드디어 몇몇 이름과 만났다.

이름: 박자청. 무관. 태종 조의 감역관으로서 많은 공사를 이끌어 공조판서에 올랐다. 공사 감독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던 듯하다.

이름: 홍계학. 정조대 경모궁 개건 사업에서 5개월 정도 현장 감독(감조관)을 지냈다. 48세에 비로소 진사시에 합격한 문관.

이름: 박봉상. 문관도 무관도 아닌 동산직으로 1771년 궁궐 밖의 수목 관리 및 경기도 일대 외원의 과목과 화초 재배를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동산직은 품계가 없어 잡직에도 못 올라가는 솔속노비로 분류했다. 그래도 급료는 받았다고 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하는 일은 베를린의 수목관리팀장 프랑크와 같았으나 서열로 보면 잡초의 여왕 마누엘라에도 못 미쳤던 것 같다.

문득 동산지기 박봉상 연대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녹지행정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오리무중이다. 누군가 이에 대해 논문을 써 주었으면 싶다. 아니면 이미 발표된 것이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걸까? 대한민국 녹지행정 150주년 기념행사는 언제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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