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시대] 조경을 위한 기준
[조경시대] 조경을 위한 기준
  • 신준호 객원 논설위원
  • 승인 2020.07.13
  • 호수 5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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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호 더가든 부장

[Landscape Times] 조경설계사무소에 입사 후 신입으로서 가장 먼저 맡았던 업무는 캐드로 녹지구적을 따서 면적을 산출하고 계산기 또는 엑셀을 이용하여 각종 법적수량을 산출하는 일이었다. 그때까진 몇 개의 캐드 명령어 입력과 간단한 산수만 할 줄 알면 되는 이 단순업무가 조경일을 하는 한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건축에서 동 배치를 약간 틀기라도 하면 변경된 배치도를 받아든 채 한숨을 쉬며 다시 구적을 따고, 식재계획도 작성이 완료된 이후엔 관련도서의 변경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량이 바뀌지 않도록 교목 심볼을 적당히 옮기고 아메바처럼 생긴 관목 덩어리들은 수종별로 정해놓은 식재밀도 때문에 면적이 바뀌지 않도록 다시 그려야 했다. 거기에 각종 심의나 자문의견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식재목록의 수목들은 양수, 음수, 중용수, 천근성, 심근성, 유실수 등 몇 가지 단순한 특성만으로 구분되어 선택을 기다리며, 단지 입구엔 소나무, 팽나무와 같은 대형수목 군식, 동 출입구마다 주목 등 독립수목 식재 같은 비공식 메뉴얼을 따르다보면 현상 때 내세웠던 온갖 전략과 디자인은 퇴색되고 납품도면에 도장을 찍을 때쯤이면 매번 느끼는 기시감이 찾아왔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었지만 십 수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제 조성된 조경공간들을 방문하거나 시공의뢰를 위해 들어오는 조경도면을 받아볼 때마다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조경이 50여 년의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국내외 조경기술은 발전을 거듭하고 시대적 요구 또한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특히 뉴욕 하이라인 프로젝트 등을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피에트 우돌프(Piet Oudolf)의 다년생 초본류를 중심으로 하는 자연주의 식재디자인(Naturalistic planting design)은 이미 하나의 커다란 세계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순한 유행이나 트렌드가 아닌 서식처 보전 및 종다양성이 가진 생태적 가치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디자인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 즉 패러다임의 변화로 바라봐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하여 겪게 된 최근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도시의 확장으로 인해 다양한 생물들의 서식처가 지속적으로 사라지는 현실 속에서 단순히 녹지면적이나 수목의 수량, 규격의 양적 증대를 통해 녹시율을 늘리는 방식의 조경은 더 이상 시민들의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 또한, 기술이 발전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요소들이 주변을 채워갈수록 원초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은 늘어나며 개별공간보다 그 공간으로 인해 주변이 함께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디자인이 요구된다.

하지만 국내의 조경기준, 특히 교·관목 수량 위주의 식재기준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워 보인다. 식재기준에 명시되어 있는 교·관목의 수량이나 상록수의 비율 등은 과학적, 생태적 근거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조경디자인의 질을 떨어뜨리고 다양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미 콘크리트 덩어리로 가득 찬 도시 내에 소나무와 같은 상록수는 분위기를 더욱 어둡고 침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낙엽수나 다년생 초화류에 비해 계절과 경관의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 또한, 관행적으로 밀식하는 관목은 더 이상 참새 등 소형조류의 피난처나 활동공간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잡초제거와 전정 등 유지관리를 위한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기 위해 지역에 따른 특성수종의 비율까지 명시하고 있다지만 대상지가 속한 지자체에서 임의로 지정한 상징수목들로 그 수량을 채우는 현실은 코미디에 가깝다. 사실 식재기준에서 “대기오염물질이 발생되는 지역에서는 대기오염에 강한 수종을 식재하여야 한다.”와 같이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사실이 명기된 몇 가지 문구를 제외하면 보편타당하고 합리적인 기준이라 보기 어려워 오랜 기간 이 기준이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에 심각한 의문이 들 지경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경기준 폐지’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본 결과 지난 2014년 ‘건축법 일부 개정령안’을 두고 국토부와의 마찰이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조경사회(현 한국조경협회)는 의견서를 통해 도시에서 조경공간이 줄 수 있는 여러 기대효과를 기능이라 피력한 후 조경기준 고시 폐지의 불합리성으로 제안이유와 주요내용의 근거 부족, 조경공간의 축소우려를 내세워 반대의견을 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현재, 과연 그 기능들은 얼마나 제대로 작동을 하고 있는지, 조경기준 자체의 불합리성은 없는지, ‘준공조경’이라는 이름의 요식행위로 먹고 사는 업자들이 여전히 판을 치는 현실은 왜 그대로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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