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Landscape Times] 무겁고 답답하던 겨울을 걷어내고 여 름이 선뜻 다가왔다. 음(陰)의 기운을 이겨내고 양(陽)의 기운이 다가온 것이 다. 땅 속에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씨앗들, 가지 끝에서 피어날 때를 노리 던 꽃과 잎들이 기지개를 켜고도 시간 이 많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맹렬한 여름 태양을 견디고 즐기며 생을 꾸려 가는 식물들은 아름답다. 만개한 꽃만 아름다운 건 아니다. 자기 할 일 다했다 고 동네방네 자랑하는 꽃들도 멋지다. 사람들은 그들을 ‘시든 꽃’이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과업을 달성한, ‘볼 일 다 본’ 꽃이다. 

꽃은 왜 유독 아름다울까? 우리는 왜 꽃을 보면 경이로움과 화사함을 느낄 까? 가슴 깊이 차오르는 신선함과 따뜻 함은 꽃이 주는 선물이다. 과학자들은 꽃의 생김새에 호기심을 실어 날랐다. 얼핏 보면 다양해 보이는 꽃잎 모양 속 에는 피보나치수열이 숨어있다. 레오나르도 피보나치(1170~1250)가 소개한 이 수열의 비밀은 선행하는 두 가지 숫자의 합이 다음 합의 수치가 되는 특수 한 수열로서 그 비율은 1:1.618이다. 

이 비율은 시각적으로 균형감각을 주 어 이를 황금분할 또는 황금률이라고 한다. 솔방울의 경우 비늘 같은 조각이 오른쪽나선과 왼쪽나선으로 교차하는 데, 그 수는 각각 8개와 5개이다. 이 두 나선의 숫자는 피보나치수열에서 서로 이웃한다. 해바라기꽃 씨앗도 피보나치 수열을 보여준다. 씨앗들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방향의 나선을 이루고 있는데, 하나는 시계 방향, 다른 하나는 반시계 방향이다. 각 방향의 나선의 수는 각각 21:34개인데, 큰 해바라기의 경우에는 55:89개, 또는 89:144개가 되기도 한다. 

이 숫자의 비율은 어김없이 1:1.618이 다. 우리가 해바라기를 보면서 아름다 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절묘한 조합, 황금비율 때문이다. 식물들의 아름다 움은 정교하게 짜여진 노력(!)의 산물 이다. 혼인의 중매쟁이들을 불러들여야 하니 말이다.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것 은 없다. 꽃뿐만 아니라 잎, 줄기의 배 열과 나뭇가지의 모습에도 피보나치수열이 숨어있다. 처해진 환경에서 살아 남는 지혜의 일환이다. 식물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성장해 나갈까? 이 또한 과학자들의 궁금증을 건드린 주제이다. 

성장과정에서 식물의 형태와 구조는 환경, 즉 외부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고 수시로 변화해 간다. 자연세계의 생명 체들은 스스로 자라나지만 환경과의 연속적인 작용에 의해 생명의 항상성을 유지하고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담쟁이는 현명하게 살아간다. 담쟁이는 자기 삶의 터전인 담의 특성을 잘 살펴 서 삶을 도모한다. 어디로 향할지 방향 을 정하고 나아가다가 그 쪽에 장애물이 있거나 어려움이 닥치면 가차 없이 진로를 수정한다. 담쟁이는 종과 횡의 아름다움과 균형을 안다. 

위로 오르다가 옆으로 쉬어가는 지혜를 발휘한다. 살아가는 데 위험을 줄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무의 장수비결 또한 줄기와 가지 사이의 균형이다. 줄기는 위로 향하고(從) 가지는 옆으로 뻗는다(橫). 식물들은 이처럼 음(陰)과 양(陽)의 자연법칙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동양에서는 자연과 생명체가 모두 음과 양의 만남과 조화에서 비롯되고 유지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음양이 한번씩 교차하는 것이 바로 도(道)라고 하 였다. 도(道)라는 걸 신비하고 오묘한, 감추어진 진리라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도(道)는 어디에나 다 있고 어디에나 통용되는 이치이다. 동양의 사상은 줄 곧 생명의 식물적 이치에 관심을 갖는 다. 나고 자라나고 결실을 맺고 죽고 다시 나고 자라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항상성과 조화와 적응의 결과이다. 민첩한 정보력과 순간의 판단력이 있어야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도(道) 라는 것은 생명체의 항상성 유지와 관련된다. 항상성이 깨어지면 그 생명체는 바로 죽는다.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성(誠)이다. 정성은 하늘의 도이고 정성을 다하려는 생각은 사람의 도(할 일) 이다. 하늘의 도는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세상 이치에 딱 들어맞고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몸으로 깨달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이 다. 동양 고전에 적힌 말들은 추상적이고 신비한 이야기가 아니다. 고리타분한 도덕의 교훈 또한 아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인간과 동물과 식물을 아우르는 생명의 일상사를 적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솔방울과 해바라기 씨앗은 피보나치 수열을 이루어 아름다움과 조화로 무장하여 생명을 이어간다. 담쟁이는 여느 나무들처럼 횡과 종으로 한번은 음(陰) 하고 한번은 양(陽)하면서 성장과 생활 을 한다. 정보력과 적응과 판단이 그들의 정성(誠)이고 도(道)이다. 시시각각 의 조화와 적응이 그들에게 서려있다. 그래서 도(道)는 아름답다. 동양의 사상은 식물의 아름다운 도를 알리고 찬양 하는 식물적 사유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응축할 수 있다. 바로 ‘생명’이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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