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을지로 도심산업유산, 정원으로 기억하고 기록하다
청계천·을지로 도심산업유산, 정원으로 기억하고 기록하다
  • 이수정 기자
  • 승인 2020.05.20
  • 호수 5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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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과 사람 기념한 ‘오래된 정원’
산림동(山林洞)‘ 장인의 화원’, 인현동 ‘을지림(乙地林)’
조성해 상인들 숨통, 역할 분담해 관리도
재개발이 남긴 “경관의 사유화” 안타까움
작은 자연 정원, 도시재생 패러다임 바꿀까
‘을지림(乙地林)’. (기획 고대웅, 공간설계 및 시공 라디오·A1, 식재설계 오하나, 을지의자 설계 고대웅)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내 정비구역 중 일몰연장 구역에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시 ‘동네숲 가꾸기 지원사업’을 통해 조성됐다.
‘을지림(乙地林)’. (기획 고대웅, 공간설계 및 시공 라디오·A1, 식재설계 오하나, 을지의자 설계 고대웅)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내 정비구역 중 일몰연장 구역에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시 ‘동네숲 가꾸기 지원사업’을 통해 조성됐다. 

[Landscape Times 이수정 기자] 청계천변의 풍경이 바뀌고 있다. 청계천 인근 지역을 서울시가 재정비촉진구역으로 지정하면서 공구상가, 인쇄산업, 유통업 등 번성했던 골목골목 도심산업 현장의 많은 구역이 이미 개발됐거나 공사 중이다.

전자부품을 사기 위해 잦은 발걸음 했던 이들이라면 세운상가 일대의 풍경은 독특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종묘와 창덕궁이 맞은편에 있고 고개를 돌리면 남산이 보이고 그 가운데 세운상가가 우뚝 선 청계천 일대의 고유한 풍경이 그것이다.

이 일대에는 개발시대를 거친 제조업의 어제와 오늘이 아직 남아있다. 오세훈 서울시장 당시 재개발로 추진됐던 사업이 그나마 도새재생을 고려한 정비사업으로 방향 전환을 맞았지만 공구상가가 밀집된 입정동 등 오래된 많은 동네들이 철거됐다.

서울시는 지난 3월 일대 상인들 및 시민단체 의견을 수렴해 산업생태계로 독특한 도심경관을 형성한 세운상가 일대 재개발을 해제하고 산업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도시재생사업으로 추진하는 ‘세운상가 일대 도심산업 보전 및 활성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이곳 상인들과 시민단체들은 재개발 해제를 기대했다. 그러나 지난달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내 152개 정비구역 중 63개 구역의 일몰기한이 연장된다는 내용을 담은 시의회 통과 발표에 따라 내년 3월까지 사업시행인가 신청이 이뤄지면 재개발 가능성은 다시 열리게 된다.

도시재생과 재개발의 줄타기 정책 가운데 예술가, 조경가, 지역민의 힘으로 변화하고 사라져가는 도시의 모습을 기억하고 이곳을 살아간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정원이 을지로의 작은 골목에 피어났다. 쉼 없이 평생을 이곳에서 땀 흘린 노동자들의 유일한 녹색 쉼터도 조성됐다. 아쉽게도 정원이 만들어진 두 곳 모두 일몰연장된 구역이다.

지난 8일(금) 조경인들과 손잡고 정원을 기획한 고대웅 작가를 이곳에서 만났다.

도시와 사람을 닮은 정원 ‘장인의 화원’과 ‘을지림’

청계천변은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인쇄업, 철공산업, 가구산업 등 도심산업 전진기지가 됐다. 종묘 앞에서 필동까지 너비 50m, 길이 1180m의 지금의 세운상가 터는 일제강점기 때 미군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비워둔 소개공지였다. 한국전쟁 이후 무허가 판자촌이었던 이곳을 정부가 1960년대 들어 불량주택 개량사업을 통해 강제철거하면서 세운상가를 건설했고, 공구상과 다양한 제조업은 청계천변과 골목 안쪽으로 터를 잡으면서 청계천 을지로 일대는 도심제조업의 중심이 됐다. 상인들은 수십 년을 한자리에서 일하며 다른 사업장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탱크도 만들 수 있는” ‘장인’으로 성장했다. 촘촘히 얽힌 분업체계로 유지되다 보니 단기간 적은 비용으로 최적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이곳만의 기술 경쟁력이 생겨났다. 국내외 많은 디자이너들과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기도 하다. 을지로를 거점으로 한 젊은 메이커들도 늘어났다.

‘장인의 화원’이 조성된 정원은 산림동(山林洞)에 속한다. 을지로에 녹지가 거의 없는 걸 감안하면 철공소가 가득 들어선 이 공간의 이름은 역설과 모순으로 들린다. 정원은 이들 장인들의 노고를 기념하고자 2017년 동네숲 가꾸기 지원사업으로 조성됐다.

공간을 물리적으로 기록하는 예술가 고대웅 작가는 “중구청의 공간지원사업으로 입주 혜택을 받아 예술가들이 이곳까지 찾아올 수 있었다. 이분들의 가치와 지역을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했다. 막연한 조형물보다 식물로 기념하고 같이 가꿀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 싶어 대상지를 골목골목 찾았다. 마침 서울로7017로 윤호준 조경하다 여름 대표와 인연이 닿아 정원 자문을 받고, 안기수 에이원 소장으로부터 시공 도움을 받았다.

철공소 골목 담벼락에 조성된 ‘장인의 화원’은 조성 당시 주차차량 문제 등으로 마찰을 빚었지만 지금은 골목 상인들이 함께 공동 관리하는 정원으로 자리 잡았다. 주차 공간을 뺏겼다는 부정적 시선도 해소됐다. 조성 당시 식물을 계획해 식재했지만 콘크리트를 뚫고 혼자 자란 포도나무, 아현동 재개발로 이식해온 라일락처럼 정원에는 가꾸는 사람들의 지난 시간이 녹아있다. 화단이 생긴 이후로는 벌이나 나미, 거미가 생겨 파리도 예전처럼 많지 않다.

 

철공소 골목에 조성된 ‘장인의 화원’.
철공소 골목에 조성된 ‘장인의 화원’. 플랜터나 조형물, 안내판 등 화단에 필요한 시설물을 인근 금속 기술자와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조성했다.  

 

정원에서 쉬는 사람들. 철공소나 볼트가게, 식당 등 인근 상인들이 물 주기나 식물 교체 등 화단을 함께 관리한다.  ⓒ알3028(주)
‘장인의 화원’.  철공소나 볼트가게, 식당 등 골목 상인들이 물 주기나 식물 교체 등 화단을 함께 관리한다. ⓒ알3028(주)

 

‘을지림’, 고대웅 작가 기획, 김지환·안기수 소장

설계·시공, 오하나 작가 식재설계 참여

‘을지림(乙地林)’이 있는 인현동 인쇄 골목은 700년 된 길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난해 6월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쓰레기로 가득 찬 땅은 펜스로 막혀 진입이 아예 불가능했다. 쓰레기를 걷어내고 청소하고 정원을 조성한 결과 이제 인근 상인들의 마당이 돼 쉬는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고 작가는 “공해가 야기되는 지역이다 보니 그 안에 작은 자연을 만들면 또 다른 패러다임으로서 이곳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 기점으로 (녹색문화가) 퍼져나갔으면 했다. 물리적으로 땅이 없어 벽면을 활용하면 좋은데 시에서 일몰연장하면서 상인들 상심이 크다”면서 어느새 높은 빌딩이 들어서 답답해진 이 일대 경관의 아쉬움을 전했다.

이어 “이 동네가 옛날에는 건물이 낮아서 주변에 펼쳐진 산이 보였다. 산은 마을의 정원이었을 텐데, 지금은 빌딩으로 둘러싸여 하늘이 고개를 들어야 볼 수 있다. 2016년만 해도 을지로 4가역을 나오면 남산이 보였다. 돌아서면 북한산이 보였다”며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자연을 공유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자연을 박탈당한 느낌이다.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걸 느낄 수 있는 게 하늘이고 자연인데 그게 막혀 점점 자연과 멀어져가고 있다. 이 공간 안에서 자연을 다시 불러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라는 질문에서 정원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기획자와 함께 설계, 시공, 식재까지 작업과정에 함께 참여한 협업팀은 녹지가 전무하다시피 한 을지로 산업지대라는 특수한 노동환경에 가장 적합한 쉼터 개념으로 접근했다. 설계를 담당한 김지환 조경작업장 라디오 소장은 “주로 영업하는 곳이라 이곳에 꽃을 심고 정원을 만들기에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단순히 정원을 조성한다기보다 잠시 머무르기 좋고 같이 가꿔나갈 공간이었으면 했다. 상업공간 속에서도 조경작업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공간을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일반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조경이 가진 가능성을 조경을 인지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계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정원 입구 서어나무를 지나면 동네 정원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푯말을 볼 수 있다. 30년 넘게 이곳에서 다방을 운영하는 조경순 씨의 이름이 보인다.

다방과 가까워 관수나 전지를 위해 정원을 자주 들여다본다는 조 씨는 “처음에는 사람들이 왜정원을 만드냐고 했는데 지금은 다들 좋아하며 찾는다. 자연을 안 좋아할 수가 있나”면서도 “이 동네 사람들이 거의 세입자다. 젊은 시절 와서 70, 80세가 됐다. 동네가 없어지면 아쉬움이 클 것이다. 무작정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갈 곳부터 정해줘야 하지 않나”고 대책 마련을 호소했다.

인현동 인쇄소 골목에 조성된 ‘을지림(乙地林)’. 마땅히 쉴 곳이 없는 상인들의 쉼터로 사용되고 있다. 
인현동 인쇄소 골목에 조성된 ‘을지림(乙地林)’. 녹지가 거의 없는 이곳에 정원은 노동자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쓰레기로 가득 찬 조성 전 모습과  중구청 옥상에서 바라본 '을지림' 조성 전 모습 ⓒ알3028(주)
쓰레기로 가득 찬 조성 전 모습과 중구청 옥상에서 바라본 '을지림' 조성 전 모습 ⓒ알3028(주)

 

‘을지림’을 기획한 고대웅 작가(오른쪽)와 상인 조경순 씨
‘을지림’을 기획한 고대웅 작가(오른쪽)가 정원을 주로 관리하는 상인 조경순 씨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상인들, 일몰연장에 민간참여협의체 요구

2016년부터 이 일대에서 상주해 활동하며 이곳 생태계를 잘 알고 있는 고 작가는 을지로 산업생태계를 활용해 기술자와 을지로 장인들을 초청해 강연하는 워크숍 ‘을지로 사용법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북촌에 한옥마을이 있다면 이곳은 유서 깊은 건물들도 많고 근대화된 한옥도 있고 근대건축물이 조화롭게 엮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옛 도시모습을 유지하면서 도시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해보면 도시개발 방향도 바뀌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기준이 반영됐다기보다 효율성과 실용성, 수익을 위한 형태로만 도시계획을 시행해버리지 않았나.”

슬럼화된 건물을 정비하기 위해 아파트형 공장이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건물 설계가 입주한 종사자들에게 최적화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고 작가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작업실, 배기문제, 공기정화시스템, 재료 운송 등 설계가 디테일해야 그 용도를 다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업 종사자들 의견이 설계에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내 정비구역 중 63개 구역이 일몰기한이 연장돼 상인들은 재개발에 한숨 돌렸던 터라 허탈감은 더욱 크다. 이에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일몰연장안에 대해 상인들과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등은 시민보다 토건을 대변하는 시의회 및 도시재정비위원회 위원의 재정비를 요청하며, 상인, 시민단체, 행정 등이 함께 하는 협의기구 구성체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조경신문]

 

철공소 골목에 조성된 ‘장인의 화원’.
철공소 골목에 조성된 ‘장인의 화원’
인쇄골목 곳곳에 조성한 틈새정원. 녹지가 거의 없는 곳이라 플랜터나 프레임을 최소화해 식물을 식재했다. ⓒ알3028(주)
인쇄골목 곳곳에 조성한 틈새정원. 녹지가 거의 없는 곳이라 플랜터나 프레임을 최소화해 식물을 식재했다. ⓒ알3028(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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