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Landscape Times] 로마의 공기가 청정해지고 베니스의 운하에 다시 맑은 물이 흐른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탈리아에서는 지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로 인해 지옥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니 파란 하늘과 맑은 물이 시니컬하지 않을 수 없다. 겨우 내 우중충하던 베를린 하늘도 봉쇄가 시작된 이후 미치도록 파랗다.

독일의 코로나19 감염 확진자 수가 한국의 확진자 수를 추월한 지 며칠 되었다. 지난 토요일 저녁 메르켈 총리는 기자회견을 통해 앞으로 “2인 이상의 만남을 금한다.”라는 내용의 새로운 코로나 확산 방지 방책을 발표하고 나서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하필 총리의 의사가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첫 테스트 결과는 음성이라고 한다. 메르켈 총리는 아직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뒤이어 영국 총리도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여태 최고의 자유를 누리며 살던 유럽인들이 여행금지, 통행금지, 접촉금지령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게 완전봉쇄하는 이유는 기하급수적인 확산의 속도를 다소 늦추자는 것이다. 확산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고 보는 모양이다. 이참에 어느 동네 사람들이 말을 안 듣는지도 드러났다. 독일의 경우 북쪽의 함부르크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직도 호숫가나 광장에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며 모처럼의 햇빛을 즐기고 있다.

베를린시에선 코로나 전문 병원 설립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새로 짓기엔 시일이 촉박하니 박람회장 건물 일부를 개축하여 만든다고 한다.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다는 뜻일 터이다. 전문가들 의견에 따르면 전 인구의 70% 이상이 감염되어야 끝날 것이며 약 2년 정도 걸릴 것이라 한다. 여름에 좀 주춤했다가 늦가을에 다시 시작할 확률이 크다고 한다. 내년 초쯤 백신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그로써 위기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 후에 또 다른 변종 바이러스가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2003년 사스, 2015년 메르스에 이어 불과 4년 만에 코로나19가 등장했다. 앞으로는 휴대전화 신형이 나오는 속도보다 신종 바이러스가 나타나는 속도가 빨라질지도 모른다. 코로나19는 종전과는 달리 일부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게다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의 가난한 지역보다 부유한 산업국가가 가장 크게 타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니코 페히 교수의 저서 <성장으로부터의 해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바꾸지 않으면 (천재지변 등이 일어나) 바꾸도록 강요될 것이다.”라고 경고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말한다. 마음대로 여행하고 마음대로 소비하며 사는 것.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런 삶의 방식을 당연한 권리라고 믿고 있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자제하지 않으면 강제로 제동이 걸릴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바로 그 상황이 발생했다. 그동안 시나리오가 여럿 있었다. 빙하가 녹아 대륙이 물에 잠길 것이다. 또는 핵전쟁으로 인해 지구가 불모의 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자연이 바이러스를 보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킬러 바이러스는 공상과학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여겼었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물 바이러스. 적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싸움이 더 힘겹다. 그동안 인플루엔자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고 있음에도 여전히 과소평가했었다. 현대의 의학으로 잡지 못할 리 없다고 믿었던 적(敵)이다.

회향. 다 자라면 뻣뻣하지만 어린 순은 나물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고정희
회향. 다 자라면 뻣뻣하지만 어린 순은 나물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고정희

이것이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과 인과관계가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다. 물론 그 인과관계가 표면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다. 다만 지금 바이러스로 인해 지금껏 살아온 방법에 급제동이 걸림으로써 역으로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환경문제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었고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해외여행이 극히 제한되었고 슈퍼의 청과물 판매대가 텅 비었다. 어제 장 보러 갔다가 겨우 호박 두 개 건져서 돌아왔다. 겨울철 청과물은 대부분 남쪽 나라에서 수입된다. 이제 그 길이 막혀버렸다. 국가 간에 주거니 받거니 하던 길이 막혔다. 중국에서 부품이 오지 않기 때문에 생산이 극히 제한된 업종도 적지 않다. 경제적 타격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니 말할 계제가 아닐뿐더러 평소 과다 생산을 우려하고 있었으므로 미안한 얘기지만 오히려 잘 된 것이 아닌가 생각 중이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의 일상을 보면 겨우내 신선한 청과물을 먹는 것이 과연 당연한 일이었던가?

내 경우 스페인 산골에 갇힐 뻔했다. 여행은 아니고 말라가 대학에서 이번 봄 학기에 강의를 할 예정이었다. 인근의 산골 마을에 숙소를 잡아두고 지난겨울부터 가서 몇 달 은거하면서 강의 준비도 하고 다음 책을 집필할 계획이었다. 지난 삼십 년간 다녔던 익숙한 마을이다. 그런데 갔다가 베를린에서 급히 해결할 일이 생겨 잠시 돌아와 일을 보던 중 스페인에 코로나19가 급속히 번져 하루아침에 대학이 문을 닫고 감염자 수가 하늘로 치솟아 결국 재출국을 포기했다. 아슬아슬하게 들어갈 수는 있었겠으나 돌아올 길이 막막했다. 지금 베를린에 갇혀 근신하면서 만약에 갔더라면 산골 마을에서 어떻게 연명했을까 이모저모로 상상 중이다. 그 마을은 슈퍼는커녕 동네 가게 하나 없는 곳이다. 식당은 물론 없다. 매일 아침 빵 파는 아저씨가 트럭을 몰고 한 바퀴 도는 곳이다. 일주일에 한 번 청과물 트럭이 오는 곳이다. 아마도 지금은 빵도 청과물도 오지 않을 것이다. 쌀, 파스타, 밀가루, 차와 커피는 넉넉히 준비해 두고 왔으나 그렇다고 여러 달을 지낼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밀가루가 떨어질 때까지 빵은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어떻게 조달해야 할까. 정원의 오렌지 나무에 열매가 익었을 테니 우선은 그것을 따먹으면 될 것이다. 토마토와 상치, 깻잎 종자를 챙겨두었으니 그것을 심고 감자, 양파, 마늘도 아쉬운 대로 남은 것을 땅에 묻어 기르면 될 터인데 그것들이 다 자랄 때까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이웃에 아보카도 농장이 있던데 서리를 해야 하나? 그렇다고 아보카도만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을까? 아! 지금쯤 산기슭에 회향 새순이 무더기로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회향을 캐서 나물을 해 먹을까? 그걸 데쳐야 하나 아니면 그냥 생채로 갖은양념을 해야 하나? 이렇게 상상하던 중 문득 두 가지 깨달음이 왔다. 우선 나 역시 사시사철 공급되는 신선한 과일과 채소, 풍부하고 다양한 식단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상상, 부족한 것을 냉큼 가서 사 오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견디며 때에 따라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상상이 큰 즐거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과잉 소비에 심리적으로 적지 않게 시달렸던 것은 아닐까.

봉쇄가 풀리면 다시 가서 우선 회향 나물무침부터 해 볼 생각이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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