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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Landscape Times] 지난주부터 꽃자두, 꽃복숭아가 피기 시작했다. 4주 정도 빠르게 왔다. 내게는 기적으로 느껴지는 그 분홍꽃들을 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오가는 데, 문득 스웨덴 예테보리의 핑크 풀장이 떠올랐다. 스웨덴 사람들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체격이 크다고 알려졌다. 그 커다란 사람들이 핑크빛 풀장에서 수영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내년 2021년에 스웨덴의 도시 예테보리가 400주년을 맞게 되는데 이를 기해 도심에 있는 구 산업 항을 재생하여 신도시를 만들고 그 중심에 강변공원을 조성하고 있는데 그 설계를 토포텍 1에서 맡았다. 2021년에 1단계를 완성하여 우선 오픈할 것이며 2026년에 2단계를 마치면 공원이 완성될 것이라 한다. 2016년 실시한 국제현상공모에서 토포텍 1의 설계는 다시금 일반적인 공원 개념에 대한 반역을 꾀했고 그것이 마침 도시공원의 새로운 유형을 찾던 예테보리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 일등으로 당선되었다. 

토포텍 1의 레인-카노 대표는 예테보리 수변공원 설계에 두 가지 원칙을 적용했다고 설명한다. 우선 항구란 곳은 강의 자연적 요소와 산업시설이라는 인위적 구조 간의 ‘관계’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장소이니 이 관계를 부수지 않고 그대로 이어받아 업데이트했다. 둘째, 공공공간의 기능과 이용유형을 사전 정의하는 대신 스스로 형성하고 정의할 수 있도록 유도해 내는 것이다. 공원의 미완성 교향곡이랄지 완성품을 내보이기보다는 미완성(unfinished)인 채로 두는 무계획함을 계획했다고(planned unplanned)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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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으로 채운 베를린 AEDES 건축갤러리 ⓒTOPOTEK1

자연요소와 산업시설 간의 관계를 유지하고 이를 업데이트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런데 “기능과 이용성이 스스로 정의되도록” 유도해 내는 것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예테보리 폐항의 재생 사업이 결정되고 나서 향후 수만의 인구가 신도시에서 살게 될 것이므로 우선 구청부터 만들어 사업을 추진했다. 낙후된 폐 산업시설이 그러하듯 잿빛이 지배하는 추레한 도시풍경이었고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물가에 수변공원을 만들어 신도시 주민들이 모두 모여 와글거리는 생동감 있는 곳으로 거듭나게 했으면 좋겠다는데 책임자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우선 폐항지구에서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지부터 테스트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2015년에 <공간실험소>라는 이름의 베를린 예술가 그룹에 의뢰하여 임시 사우나 경관을 만들었다. 기존 조선소 시설을 재활용하여 사우나와 옥외 풀장을 만들어 시 운전해 본 것이다. 이것이 뜻밖에 큰 인기를 끌었고 예테보리 시민들이 만남의 장소로 즐겨 이용하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2016년 공원설계 국제현상공모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이때 물론 “모든 신도시 주민들이 모여들 수 있는 공원”을 요구했다. 

사업대상지, 예테보리 폐항은 손가락 세 개를 내민 것과 같은 형상인데 그중 손가락과 손가락이 만나는 곳, 즉 도시와 항구가 만나는 곳을 어번공원으로, 긴 검지에 해당하는 곳을 녹색 공원으로 정의했다. 약지에 해당하는 곳은 신도시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제외되었다. 녹색 공원은 일반적인 식물 위주의 공원으로 설계한 한편 이곳에 즐비한 기존 산업시설물을 죄다 연한 녹색으로 덧칠했다. 관건은 어번공원이었다. 이곳은 공원으로 들어오는 관문이고 물가 광장에서 만나 놀고 웃고 즐거워하는 곳이어야 했다.  중지의 안쪽, 항구를 바라보는 위치에 대형 창고 건물이 한 채 남아 있는데 이를 리모델링하여 박물관, 갤러리, 각종 상점이 들어서는 몰(mall)을 만들 예정이다. 이 몰을 어번공원의 구심점으로 삼고 그 앞 광장에 여기저기 정체모를 핑크빛 ‘물체’들을 배치했다. 핑크빛 고래, 핑크빛 백조 보트, 핑크빛 테이블, 핑크빛 차일, 핑크빛 이글루 등등. 이 물체들은 일종의 폴리(folly)라 할 수 있다. 폴리란 영국 풍경화식 정원에 설치되었던, 기능과 용도 없이 단지 분위기를 연출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소건축물을 말한다. 이를 토포텍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탄생한 것이 분홍색 물체들이며 레인-카노 대표는 이들을 수집품이라 부른다. 그는 또한 170m 길이의 염수 풀을 하나 디자인하여 물 위에 부유하게 하고 이를 ‘핑크 풀’이라 칭했다. 풀장의 경계석을 핑크빛으로 칠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토론 과정에서 연한 녹색으로 귀결되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커다란 스웨덴 사람들이 핑크빛 풀장에서 수영하는 광경은 자신들도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토포텍이 핑크빛 물체를 배치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2004년 독일 볼프스부르크 정원박람회 당시에 핑크빛 기구 내지는 풍선(inflatables)으로 구성된 놀이터를 조성하여 이미 물의를 빚은 바 있다. 그 많은 색상 중에 하필 핑크를 택한 이면에는 레인-카노 대표의 도발 의도가 숨어있을 것이다. 핑크는 유럽 건축가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색깔이다. 검은 의상만 입고 다니는 그들은 사무실 실내디자인은 물론 사는 아파트의 가구며 소품까지 대개 무채색을 쓰며 벽에 걸린 그림도 흑백인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시크해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색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그중 분홍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광장에 천연스럽게 핑크빛 물체들을 여기저기 배치했을 뿐 아니라 핑크빛 백조 보트를 타야 풀에 도달할 수 있게 설계했으니 그 저의를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왜, 하필 핑크냐는 질문에 레인-카노 대표는 이렇게 대답했다. “핑크는 진지하지 않다. 그러므로 소통을 가능케 하는 색이다.” 주민과의 소통과 대화는 토포텍이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다. 설계 과정뿐 아니라 공원이 조성된 이후에도 주민들이 끊임없이 소통하여 공원이 변화하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예쁜 분홍색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사실 거의 없을 것이다. 분홍색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상징성 때문에 건축가들이 꺼리는 색이 되었다 하더라도 누구나 분홍색 앞에서는 마음의 경계를 풀게 된다. 대화하려면 서로 마음의 경계를 풀고 만나야 한다. 결국 마음을 푸는 열쇠로 분홍을 쓴다는 얘기다. 이 분홍 물체들은 붙박이 시설이 아니어서 언제라도 다른 것으로 교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분홍의 물체들이 배치된 어번공원은 주민들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언제든 그 모습과 분위기, 그리고 기능과 용도를 바꿀 준비가 되어있는 미완성의 공원으로 계획된 것이다.

처음 2004년 볼프스부르크 정원박람회에 설치한 이후 사람들은 분홍색을 다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분홍 물체들이 캐나다 몬트리올의 건축센터,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를 장식하고 멀리 북경, 상해 순회공연을 마친 뒤 베를린에 다시 돌아왔다. 곧 AEDES라는 베를린 건축화랑에서는 아예 공간 전체를 연분홍 물체로 채웠다. 그 유명한 슈퍼킬렌의 진분홍 광장에 매료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히 분홍의 화려한 귀환이다. 

2016년 토포텍 설립 20주년을 맞아 사옥 중정에서 파티를 열었었는데 이때 분홍 물체 하나를 객들 머리 위에 부유하게 했던 장면은 잊기 어렵다. 여간한 자신감이 아니고는 실천하기 어려운 설정이다. 분홍은 복사꽃의 색깔이기도 하다. 고대의 복숭아나무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통로로 여겼던 주술적 나무였다. 이 역시 소통이라고 본다면 레인-카노 대표는 분홍의 주술적 힘을 본능적으로 인지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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