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서스환경디자인연구원(주) 강서병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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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scape Times] 영화 ‘천문 : 하늘에 묻는다’

‘천문’은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우정을 다룬 영화이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 역은 한석규가 맡았고, 관노 출신으로 종3품 대호군이 된 천재과학자 장영실 역은 최민식이 맡았다. 영화에서는 장영실이 발명한 물시계 자격루(自擊漏)와 천체관측기구 혼천의(渾天儀)를 주로 다루고 있다. 조선의 천체과학연구에 위기감을 느낀 명(明)은 장영실을 압송하라며 사신을 파견한다. 측우기(測雨器)는 명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에서 잠시 등장한다. 연회에 불려간 장영실은 측우기에 소변을 받아 대담하게 명(明) 사신의 얼굴에 뿌린다. 불의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며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는 그의 모습에서 필자는 통쾌함을 느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만큼이나 빗물 측정기기인 측우기의 발명은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측우기는 1662년 영국에서 발명된 강우량계보다 220여년이나 앞서 발명되었다. 이러한 시간적인 측면도 있지만, 이로써 강우량 빅데이터(Big Data)가 축적되는 기반이 되었다. 강우량 기록은 1770년 영조 때부터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서울대 빗물연구센터 한무영 교수는 이 기록을 분석해 최근 들어 기상이변으로 집중호우가 증가한 사실을 밝혀냈다.

守令亦量水淺深報監司

측우기는 빗물을 빗물통으로 받아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기이다. 1441년(세종23년) 5월 19일(음력 4월 29일) 세종대왕의 아들인 문종이 발명했다. 그 해 9월 3일(음력 8월 18일) 세종대왕은 호조에 영(令)을 내려 측우기를 전국의 관청 뜰 가운데 설치하고 300여명의 수령(守令)들로 하여금 빗물의 천심(淺深)을 재어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전국의 강우량 자료를 모아 국가 정책에 활용하고 농업 발전을 이뤄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었다. 가뭄이 2년 이상 지속된 지역은 세금을 감면해 주었으며, 강우량을 게을리 측정한 관리는 엄하게 처벌하기도 했다(남도매일, 2018.9.3.). 조선왕조실록에는‘守令亦量水淺深報監司’라고 기록되어 있다. 청계천에 수표(水標)를 설치해 하천을 관리하는 도승(渡丞)이 수위를 측정한 것도 이 시기이다.

국보가 된 측우기 해부하기!

측우기는 기(器), 대(臺), 주척(周尺)으로 구성된다. 측우기를 이해하자면 조선시대의 도량 단위를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건축물은 척(尺, 30.8㎝), 촌(寸, 3.08㎝), 푼(分, 3.08㎜)인 영조척을 주로 사용했다. 반면, 천문 관련해서는 주척을 사용했다. 주척(周尺)은 1척(尺) 20.7㎝, 1촌(寸) 2.07㎝, 1푼(分) 2.07㎜이다. 조선시대에는 지방별로 여러 도량형(度量衡)을 사용하고 있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통일이 필요한 시기였다. 무게를 측정할 때 근(斤)과 ㎏, 거리를 측정할 때 리(里)와 ㎞가 그 예이다. 주척(周尺)은 강우량의 깊이를 재는 눈금자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조선왕조실록에 ‘서운관에 대(臺)를 짓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척(尺)이 되게 하고 직경은 8촌(寸)이 되게 하여 대(臺)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아 천심(淺深)을 척량(尺量)하여 보고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단위로 환산하면 길이 41.4㎝, 직경 16.56㎝이다. 현존하는 금영측우기는 높이가 1자(尺) 5치(寸)이고 직경이 7치이다. 이것을 ㎝단위로 환산하면 길이 31.9㎝, 직경 14.9㎝이다. 무게는 6.2㎏이다. 세종(1441년) 때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는 현종(1837년) 때 만들어진 금영측우기보다 조금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후기로 오면서 약간 작아진 것으로 보이는데, 대나무 마디처럼 보이는 곳을 분리할 수 있어 비가 적게 올 경우 측정이 편리하도록 고안되었다. 현재 금영측우기 1점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금영(錦營)이란 조선시대 충청도 관아가 있었던 공주를 지칭하며 충청감영이라고도 했다. 한자 금(錦)은 금강(錦江)의 금(錦)과 같다. 금영측우기는 일제시대 때 일본 기상학자 와다유지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71년 돌려받았다. 그동안 보물로 지정해 기상청에서 보관해 왔다. 2020년 2월, 문화재청은 금영측우기(보물 561호)를 국보로 승격하면서 다소 추상적인 ‘금영측우기’라는 이름을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국보 제329호)’로 바꿨다.

측우대는 측우기를 올려놓기 위한 받침돌이다. 강우량 측정과 관리의 편리함을 위해 측우대와 측우기는 80㎝~90㎝ 높이로 만들어졌다. 1441년(세종 23년) 처음 만들어진 관상감 측우대와 1770년(영조 46년) 만들어진 ‘대구 선화당 측우대(보물 842호)’,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보물 844호)’등 조선 중·후기에 제작된 측우대와 형태가 다르다. 관상감(觀象監)이란 조선시대에 천문, 지리, 기후관측 등을 하던 곳으로 지금의 기상청과 비슷한 기능을 했다. ‘관상감 측우대’는 보다 확실한 고증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이번 국보 지정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대구 선화당 측우대’는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국보 330호)’란 이름으로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국보 제331호)’와 함께 국보로 지정되었다. 세계 최초로 빗물을 측정하기 시작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현존 유일의 측우기 1점과 측우대 2점이 국보로 지정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조경가! 측우기를 알리자.

유럽을 여행하노라면 도시 공원과 광장의 중심에 설치된 위인 상(像)을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필자의 초등학교 교정에는 책을 읽는 소녀와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있었다. 이런 공간에 어려서부터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우수성과 자긍심을 느끼도록 측우기를 설치하면 어떨까? 학생들이 측우기에서 직접 비의 양을 재어보는 체험교육이야 말로 측우기의 우수성을 인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학교조경을 할 때 측우기가 교정에 많이 설치될 수 있도록 조경가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해 본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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