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겸 ㈜에스이디자인그룹 공공디자인연구소 소장

[Landscape Times] 무장애 설계(Barrier-free design),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포용도시(Inclusive city)와 같은 개념들이 공간 계획의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며 최근 이러한 개념을 반영한 공간들이 곳곳에 만들어지고 있다. 무장애 설계는 일반적으로 장애가 있는 이용자도 물리환경 및 태도 등의 장애 요인을 제거하여 어떠한 방해나 제한 없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크기, 힘, 능력 등 연령이나 신체적인 차이와 무관하게 노약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내국인과 외국인 등 모든 이용자를 포괄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소외계층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사회적 불평등 해소,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모두를 위한 도시(Cities for all), 즉 포용도시 패러다임과 이어진다.

조경 분야의 계획에도 이러한 개념은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다. 관광지, 공원, 둘레길, 걷고 싶은 길 조성 사업, 도시재생 사업뿐 아니라 주거단지와 상업 시설 등 관련 계획에서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핵심 가치로 작동하고 있다. 각 지자체는 ‘무장애’ 공원, 사회 취약계층까지 고려한 ‘무장애 나눔 숲길’ 조성과 같은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민간 부분에서도 여러 시도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만들어진 무장애 공간은 정말 누구나 이용하기 편할까? 며칠 전 방문한 모 시의 어느 공원에도 무장애 숲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실제 걸어보니 경사는 완만하여 걷기에 무리가 없어 보였으나, 무장애길 진입부에는 2cm가량의 턱이 있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안내판은 난간 일부에 부착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일부는 찢겨있었다. 갈림길이나 휴게 공간 인근을 유심히 살폈으나 안내촉지도는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시각 장애인 유도블록은 공원 전 구간 어디에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공원 안내 정보에 따르면 무장애 숲길은 전 구간 경사도 8% 미만으로 휠체어와 유모차가 편하게 오를 수 있게 조성하고, 점자 안내판, 난간 손잡이, 전동휠체어 충전소 등 편의시설을 설치하여 장애인도 보다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길이다. 정말 그러한가? 누군가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사소한 점이고 실제 이용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곳뿐 아니라 곳곳에 만들어진 무장애 공간은 ‘이름만’ 무장애인 곳들이 적지 않다. 무장애 길을 만들었으나 실제 이용자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고, 그곳에 접근하기 위한 안내 체계는 미비하며, 무장애 길에 가려면 수 개의 도로 턱과 계단을 지나야 한다.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은 장애인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 유니버설 디자인을 반영한 걷고 싶은 길 조성 사업의 전문위원으로 시민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어느 도시에 방문한 적이 있다. 조금 일찍 가서 대상지를 둘러보다 노인이 보행보조기구를 밀며 인도를 걷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인도와 이면도로의 턱을 넘지 못해 한참을 애를 쓰고 있었다. 불과 2cm도 되지 않는 턱이었다. 어찌어찌 턱을 넘어 인도를 걸어가는 노인은 무릎 관절이 잘 구부러지지 않아 바닥이 조금만 울퉁불퉁해도 걸음걸이가 위태해 졌다. 어디에도 보행안전바, 난간, 잠시 쉴 수 있는 의자와 같은 편의시설은 없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도시의 모습이고, 나의 지인이, 나의 이웃이 겪는 불편이었다.

이날 ‘유니버설 디자인을 반영한 걷고 싶은 길’ 시민토론의 참가자 중 유모차를 끄는 보호자, 지체·청각·시각 장애인, 보행보조기구를 사용해야 하는 고령자는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불편에 대한 개선 논의는 사업 시행의 시급성, 예산 문제 등으로 미래의 언젠가로 미뤄졌다. 언제쯤의 미래가 적당한 때인 것일까.

세계적인 국제정세분석 전문가인 피터 자이한(Peter Zeihan)이 제시한 전 세계 인구통계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의 평균 연령은 이미 40세를 넘어가고 있으며, 2030년에는 평균 연령이 50세에 육박할 것으로 예측된다. 2025년에는 우리나라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예측된다. 고령화의 가속화와 함께 고령 장애인 비율 또한 증가하는 추세이다. 2018년 기준 우리나라의 등록 장애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5%에 달하는 258만 6천명으로 이 중 65세 이상 장애인 비율은 2011년 38.0%에서 2017년 46.7%로 증가했다. 비장애인이지만 행동에 제약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고령자까지 포함하면 그 비율은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초고령사회까지 남은 시간, 불과 5년이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일인 것이다.

광범위한 오픈스페이스를 다루는 조경의 전 분야에서 보행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높다.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를 고려하면 앞으로 어떤 보행로를 만들지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식물과 보도블럭, 조경시설물을 활용한 미세먼지 저감, 열섬현상 완화, 생태 환경 개선, 경관 가치 제고와 같은 조경의 환경적 가치와 역할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라는 보행로의 본질 또한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녹화, 포장 및 시설물 개선에 치중한 현재의 걷고 싶은 길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보기 좋은 떡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걸을 수 없는 길이라면 걷고 싶은 길이 될 수 없다.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어야 걷고 싶은 길이다.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은 특정인을 위한 배려가 아니다. 나이 들어가는 스스로를 비롯하여 유모차를 끄는 배우자, 보행보조기구를 미는 부모님, 핸드폰을 보며 걷다가 전방주시를 하지 못하는 자녀나 손주들, 예측할 수 없는 사고로 휠체어, 목발, 안대를 하게 될 누군가와 같은 보편적인 모두를 위한 것이다.

취약한 누군가를 위한 편의는 결국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 편의인 것이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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