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Landscape Times] 겨울나무는 처량하다. 한 오라기의 잎도 남기지 않은 온전한 나목이 되어 칼바람과 추위에 노출되어 있다. 도시의 겨울이 더 쓸쓸한 건 가로수로 심긴 나무들이 초라한 나신을 드러내고 있어서다. 그들은 인간들이 제멋대로 성형해 버린 몸으로 겨울을 난다. 숲의 나무라면 본성대로 쭉쭉 가지를 올렸을 터이지만 도시의 나무는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다. 인간이 필요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에 심었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 좋은 대로 손대어 가지를 쳤다.

도시나무는 식민지 백성처럼 산다. 꼭대기의 가지는 무참하게 잘렸고 뿌리 또한 제대로 뻗어나갈 곳이 없다. 그들을 위로하는 건 새둥지뿐이다. 나무 가지 사이에서 겨울을 나려고 둥지를 튼 새들이 유일한 벗이다. 오죽하면 ‘겨울나무’라는 노래도 나왔을까?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라는 노랫말의 겨울나무. 봄·여름의 화사한 꽃과 싱그러운 잎들, 그리고 가을의 낙엽까지 모두 다 떠나보낸 겨울나무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누가 알아줄까? 봄부터 가을까지 사람들이 나무를 알아준 건 잎과 꽃과 열매라는 부산물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만들어낸 부산물들로 가족과 이웃과 사회와 함께 했던 날들이 가고 나면 진솔한 나신이 되어 나의 그림자와 마주하게 된다. 그 모습은 숲의 나무이건 도시의 나무이건 동일하다.

이제 한 바퀴의 수생(樹生)을 끝내고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건만, 모든 것을 털어낸 나무의 나신에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는 드물다. 수생(樹生)뿐일까? 인생(人生)도 그러하리라. 삶에도 봄과 여름과 가을이라는 사이클이 있다. 이 순환을 다하고 겨울로 접어들면 인생 또한 한적하고 고독해 진다. 노동과 오락과 협동의 시간들이 지나면 기다란 휴식의 시간이 다가온다. 어떤 모습의 삶을 살았든 간에 겨울나무의 시간은 오게 되어 있다. 나무는 겨울에 무엇을 할까? 노래처럼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을까?

나무는 고독한 자신과 마주하면서 다음 세대를 기약할 것이다. 나무에게는 반복되는 생의 사이클이 존재한다. 나이테를 만들면서, 나무는 같지만 다른 다음 생을 꿈꾼다. 새 봄에 피워 올릴 잎들과 꽃들, 반가이 마주할 나비와 벌과 새들을 기약할 것이다. 나무의 고독은 그들의 꿈을 키운다. 사실 겨울날 나뭇가지를 찾는 축축한 눈도 반겨줄 것 같다. 그 또한 겨울에만 맛볼 수 있는 경험 아닌가!

멋진 글씨체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는 유배지에서 겨울나무를 그려서 제자 이상적에게 주었다. 유명한 ‘세한도’이다. 이상적은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간 뒤에도 한결같이 그를 대했다. 통역관이었던 그는 청나라를 드나들며 구하기 어려운 서책들을 김정희에게 보내 주었다.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집 밖으로는 나갈 수 없던 추사에게 서책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상적의 변함없는 마음에 감동한 김정희는 그에게 무언가 보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던 그는 한 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 그림을 그려 제자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추워지고 나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했는데, 그대가 나를 대함이 귀양 오기 전이나 그 후나 변한 것이 없다. 그러니 그대는 공자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는가?” 라고 적었다.

이 그림은 상록수처럼 변하지 않는 우정과 믿음을 상징한다. 또 한편으로는 추사가 실감한 인생의 겨울을 말해주기도 한다. 나목이 되어 바람과 추위를 온 몸으로 맞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겨울나무에 빗댄 듯도 하고, 깊은 겨울처럼 힘든 시기를 지내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푸르고 싶은 자신의 염원이 실려 있는 듯하다.

추사 또한 시린 겨울을 나무에 의지해 벗 삼아 지냈을까? 그런 추사의 마음이 깃든 이 그림은 당시 조선 뿐 아니라 청나라에서도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고독 속에 희망을 품고자 하는 심정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었을 수도 있다.

다시 나무로 돌아가 보자. 인간보다 긴 삶을 반복적으로 사는 나무는 그저 외로움이나 견디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김없이 봄이 오면 새롭게 어떤 경영을 할 건지를 궁리할 것이다. 어느 가지부터 잎을 올릴지, 이번 해에는 열매를 얼마나 만들지, 어느 쪽으로 뿌리를 보낼지, 갖가지 전략을 모색하고 있을 것이다.

겨울나무는 결코 한가하지 않다. 온 몸의 세포와 감각을 다 동원하여 할 일을, 갈 길을 궁구한다. 그래서 역시 식물은 인간보다 강하다!

2020년이 다가왔고 어느덧 입춘도 지났다. 나무를 비롯한 식물들은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갖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중국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소식으로 뒤숭숭한 겨울이지만 우리 또한 어떻게든 이겨내어 다가온 날들을 살아내야 한다. 찾아온 것은 떠나가게 마련이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처럼 사라지게 되어 있다. 푸르른 생명력만 잃지 않는다면, 새 봄을 향한 소망만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낼 것이다. 도시 겨울나무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 본다.

[한국조경신문]

도시의 가로수, 무참하게 가지 끝을 잘린 나신 ©최문형
도시의 가로수, 무참하게 가지 끝을 잘린 나신 ©최문형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겨울날 소나무와 잣나무가 서로 의지하고 서있다 ©최문형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겨울날 소나무와 잣나무가 서로 의지하고 서있다 ©최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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