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 Times] 우리는 나무를 사람의 몸처럼 말한다. 오래 전부터 나무는 사람에 비유되어 왔다. 나무의 둥치는 사람의 몸통으로, 가지는 사람의 양팔로, 뿌리는 든든한 두 발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여겨왔다. 뿌리를 대지에 박고 둥치와 가지는 하늘로 향한 채, 나무는 꿋꿋이 홀로 서서 자신의 생을 감당한다. 왜 나무를 사람처럼 보았을까? 나무의 속성과 지향하는 것이 인간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탓이 아닐까! 18세기의 위대한 교육학자 루소는 그의 대표적인 고전 ‘에밀’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나무의 성장에 견주었다.

“어린 식물을 키우면 그 열매들이 어느 날 큰 기쁨이 될 것이다. 나무는 재배로, 인간은 교육으로 만들어진다.” 루소는 인간의 성장과 나무의 생장을 같은 차원에서 보았다. 인간은 나무처럼 자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숲이나 들판에서 오롯이 자라는 나무들을 틈틈이 관찰하면서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반듯하고 아름답게 자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루소는 벌판에서 외따로 자라는 나무들은 가지를 마음대로 뻗을 수 있기 때문에 위로 곧게 자라지 않고 옆으로 구불구불 커간다고 보았다. 반면에 숲속에서 다른 나무들과 오밀조밀 모여 사는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반듯하게 키를 키운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아이들도 나무처럼 자기 모습을 아름답게 키워가려면 혼자서 그냥저냥 살면 안 되고 사회 속에서 무리를 이루어 생활해야 한다고 했다. 인문학자인 루소가 숲이나 나무의 생태나 생육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가지고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래도 그는 들판에서 혼자 자라는 나무보다는 숲에서 서로 어울려 사는 나무들을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나무의 수직성이었다. 루소뿐 아니라 많은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나무의 수직성을 칭송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나무가 곧게 서가면서 대지와 물과 공기와 태양열을 결합시킨다고 했다. 또 이러한 나무의 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항상 꿈꾸게 만든다고 찬양했다.

왜 곧게 선 나무의 속성을 좋아했을까? 수직으로 곧게 서있는 것을 나무의 꿋꿋한 자립성과 자주성으로 생각한 것 같다. 숲에서 수직하는 나무들은 이미 스스로 홀로 선 존재들이다. 여럿이 함께 살아가려면 이러한 각자의 자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 또한 여럿이 함께 하려면 혼자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실질적 고독은 자연 속의 나무들을 떠오르게 한다. 홀로 서서 모든 운명과 마주서야 하는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함께 무리를 이루기는 하지만, 인간이나 나무나 고립해야만 산다.

수직으로 선 나무는 대지와 물과 공기와 태양열을 결합시킨다. (무언의 세월 4호F, 김종수 화백, 1999년 작, 유화)
수직으로 선 나무는 대지와 물과 공기와 태양열을 결합시킨다. (무언의 세월 4호F, 김종수 화백, 1999년 작, 유화)

그래서 인간 또한 나무처럼 항상 똑바로 서려고 애쓴다.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갖가지 시련 속에서 어떻게든 수직으로 일어서고 싶은 것이 인간의 간절한 염원이다. 이 염원이 똑바로 서 있는 나무들을 칭송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수필집의 비조인 ‘수상록(Essais, 1580)’을 쓴 몽테뉴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기를 살았다. 당시 프랑스는 신교도와 구교도의 다툼으로 40여 년 동안 혼란을 면치 못했다. 그가 살아간 시기만큼 그의 인생도 파란만장했다.

그는 38세에 법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고독한 생활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했다. 몽테뉴성의 별채 작은 다락방에서 무려 20여 년간에 걸쳐 많은 것을 관조하고 명상하며 적어 내려간 글이 ‘수상록’이다. 그래서 이 글 속에는 하늘을 향해 곧게 선 숲의 나무 같은 기상이 있다. 누구의 시선도 눈치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는 숲 속에서 수직으로 고립한 나무처럼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주변의 인생사들을 종횡으로 결합시켜 나간다. ‘수상록’의 한 구절을 보자.

“나는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고 내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내면을 부지런히 살핀다. 누구나 자기 앞만 쳐다보지만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본다. 내게는 나 자신의 관한 일 이외에는 상관할 일이 없다. 나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을 관찰하고 나 자신을 살펴보고 나 자신을 음미한다…나는 나 자신 안에서 뒹군다“ 그래서 이 책은 자신에 관한 관찰의 기록이고 자신 안의 의심과 경계와 경험이 결합된 삶의 욕구이다.

루소가 말한, ‘나무가 열매로 기쁨을 준다’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한 관조이고 체험이고 실현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게 소용돌이친다고 해도 귀결은 내가 열매 맺는 일이다. 그 열매를 위해 대지와 물과 공기와 태양열을 결합시키면서 나무도 나도 곧게 서간다. 그렇게 우리는 꿈꾼다. 나무처럼 우리 인간도 항상 꿈을 꾼다.

고대 로마의 시인 페르시우스의 유명한 말이 생각난다. “그대 자신의 밖에서 그대를 찾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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