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엊그제 동지가 지났다. 동지라고 해 봐야 절기의 감흥이 없어진 지 오래다. 팥죽을 못 얻어먹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팥죽을 좋아하지 않았던 관계로 그건 별로 아쉽지 않다. 단지 겨울이 긴 나라에서 살다 보니 동지가 되면 이제 낮이 조금씩 길어지겠구나라는 작은 희망을 품는 것이 전부다.

낮의 길이가 가장 짧다는 동지, 베를린에선 아침 8시 15분에 해가 뜨고 오후 3시 53분에 해가 졌다. 그렇다고 이제부터 당장 낮이 성큼 길어지는 건 아니고 12월 24일, 성탄절을 맞은 오늘, 낮이 1분가량 길어졌다. 이틀 간격으로 일분 내지 이분씩 길어진다니 겨울이 다 가려면 아직도 멀고 멀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면 겨울은 없고 오로지 어두운 계절만 남은 것은 아닐까. 눈도 내리지 않는 또 하나의 어두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문득 몇 해 전부터 설경은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올겨울엔 수은주가 영하로 내려간 적도 거의 없었다. 겨울은 이제 추운 계절이 아니라 그저 어두운 계절일 뿐이다. 오후 네 시면 이미 컴컴한데 그래도 눈이 쌓여 있으면 사위가 밝게 느껴진다. 눈이 사라진 겨울은 그저 어두울 계절일 뿐이다.

초등학교 때 어느 한해 겨울 방학을 이모님 댁에서 보낸 적이 있다. 서울 상도동 근처에 사셨는데 집 대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한강이었다. 강이 꽁꽁 얼어서 그 겨울 방학 내내 사촌들과 함께 한강에서 썰매를 탔다.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추운 줄도,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방학 숙제는 까맣게 잊었었다. 한강에서 썰매 타던 그 겨울을 제외한다면 대개는 논에 물을 대고 얼려서 만든 스케이트장에서 겨울 방학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서울 근교에서 살았던 까닭에 가능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엔 친구들과 함께 겨울 등산을 가곤 했다. 등산화나 등산 장비도 없었던 때라 운동화를 신고 눈 속을 엎어지며 자빠지며 때론 네발로 기면서도 즐겁기만 했던 겨울 산행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계곡의 얼음을 녹여서 밥을 짓고, 꽁치 통조림으로 고추장찌개를 끓여 먹는 것이 당시 유행이었다.

그 무렵 난동(煖冬) 현상이란 말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그럼에도 11월 중순, 늦어도 20일경에는 어김없이 첫눈이 내렸었다. 오래 전, 베를린에 처음 도착했던 때도 12월 말이었는데 온 도시에 흰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당시 흑백 사진으로만 베를린을 접했었기 때문에 회색의 도시를 연상했었다. 그러나 공항에서 나와 마주친 순백의 도시풍경은 매우 경이로웠다. 언제부터인가 눈 내리는 겨울이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도 과연 겨울이라 할 수 있을까? 이제 겨울 대신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붙여야 하는 건 아닐까?

ⓒ플리커
그린란드 ⓒ플리커

이렇게 눈에 대한 그리움에 잠긴 채로 신문을 펼치는데 빙하 사진과 함께 ‘보물섬 발견’이란 특집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난데없이 웬 보물섬? 알고 보니 그린란드 얘기였다. 그 이름이 무색하게 하얀 얼음으로 이루어진 겨울왕국 그린란드. 빙하에서 사는 법을 터득한, 고래기름을 특식으로 먹는, 우리와 생김새가 몹시 닮은 이누이트들이 사는 나라. 달랑 인구 5만 5천 인구 거대한 얼음 섬. 한때 덴마크가 지배했던 나라, 아니 지금도 실질적으로 덴마크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 연간 총예산의 반은 아직도 덴마크에서 대고 있으며 외교와 안보는 전적으로 데마크에서 관리한다.

사파이어와 루비로 만든 엘사의 환상적인 얼음 궁전이 있을 것만 같지만 밤이 너무 길어 실은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그런 그린란드의 두꺼운 얼음 층 밑에 상상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의 지하자원이 묻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보물섬이다. 세계 석유자원의 13%, 천연가스의 30% 정도가 묻혀 있고 그 외에 아연, 납, 금, 백금은 물론 우라늄과 하이텍 제품에 필요한 여러 희귀 금속도 잔뜩 들어있단다. 그동안은 빙하에 막혀 접근이 불가한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 기후변화로 인해 얼음이 녹아내리며 이제는 군침을 흘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미 강대국들 사이에서 물밑 경쟁이 시작되었다.

지난여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를 통째로 사겠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이 혀를 찼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러시아가 아직은 북극 항로를 혼자 통제하고 있으며 잠수함대를 확충하고 군사기지를 슬금슬금 그린란드 가까이 이동시키는 중이다. 중국에서도 이미 긴 손을 뻗쳤다. 공항을 건설해 주고 군사항만시설을 넘겨받아 재개발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그린란드 정부에서 이를 거절하고 직접 투자한 적도 있다. 이제 북극의 얼음 섬에 세계의 경제적, 정치 군사적 이목이 쏠리고 있다.

그동안 틈나는 대로 기후변화에 관해 얘기했었다. 그런데 연말에 보물섬 소식을 접하고 보니 갑자기 피로감이 밀려든다. 보물섬을 향해 손을 뻗치고 있는 강대국, 산업국의 탐욕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익히 알기 때문이다. 매사에 반응이 느린 독일 정부에서조차도 올여름 북극 정책을 새로 세웠다. 마치 그린란드가 자기들 소유인 양. 한때 미대륙이나 아프리카, 아시아를 두고 벌어졌던 강대국 간의 땅따먹기 전쟁의 재방송이 예고된 것이다. 여기다 대고 기후변화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알기 때문에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이다. 한편 그린란드 측에선 자원의 개발과 함께 앞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제 아름다운 빙하의 경관이 마구 파헤쳐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결과로 기후변화는 더욱 가속될 것이며 이누이트의 희구한 얼음 문화 역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과연 누가 그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나 자신 역시 그린란드에 러브콜을 보내는 산업국가 중에 한국도 끼어있다는 기사를 읽고 순간 안도했으니 말이다.

그린란드의 아름다운 얼음 풍경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한국이 국제 경쟁에서 뒤지지 말아야 한다는 서로 모순된 생각을 품은 채 연말을 맞는다.

지난 일 년 동안 고정희 신잡을 애독해준 독자들께 감사한다.

내년 경자년에는 좀 더 정돈된 생각과 풍성한 이야기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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