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 이옵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 이옵니다”
  • 지재호 기자
  • 승인 2019.12.12
  • 호수 5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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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면] 남한산성 행궁
인조의 삼전도 굴욕의 발자취
임시 수도 역할도 가능했던 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남한산성 남문인 지화문 ⓒ지재호 기자
남한산성 남문인 지화문 ⓒ지재호 기자

 

[Landscape Times 지재호 기자] 인조 14년인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이 발발한 병자호란.

1627년 조선을 1차 침략해 형제의 동맹을 맺었으나 청(당시 후금)은 민가 약탈을 일삼고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는 등 횡포가 날로 심했다. 때문에 조선 내에서는 후금을 치자는 여론과 함께 화의 반대자들도 들끓었다. 그러다 청의 사신이 조선을 찾았지만 감시를 받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들은 눈을 피해 도주를 하는데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을 입수해 도주하면서 병자호란이 발발하는 계기가 된다. 유문에는 청을 배척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에 청의 태종은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 2만 등 총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결집시켜 조선을 침략하게 된다.

청의 1차 침략 때와 같이 힘이 없는 조선 조정은 피난을 가는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혼비백산했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으나 이미 청의 군이 길을 막았다는 소식에 안절부절 못하고 고심의 시간을 보냈다.

 

남한산성 남문인 지화문 ⓒ지재호 기자
남한산성 남문인 지화문 ⓒ지재호 기자

 

 

 

남한산성 행궁 주출입구인 한남루 ⓒ지재호 기자
남한산성 행궁 주출입구인 한남루 ⓒ지재호 기자

 

이때 이조판서 최명길이 청의 진영으로 들어가 시간을 버는 동안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으나 남한산성 밑 탄천에 20만 청의 군사가 포진해 있었다. 청태종은 남한산성 행궁의 동쪽 망월봉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며 조선군의 움직임을 내다보며 여유를 즐겼다.

결국 청태종은 인조의 왕자를 비롯해 세자, 빈궁, 봉림대군을 볼모로 삼는 등 승리를 했고 조선은 청에 복속하게 된다.

남한산성은 지난 2017년 영화로 개봉된 바 있다. 한 달간 진행된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로 이조판서 최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조의 번민을 깊이 있게 조명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 이옵니다”라는 말은 영화 속 이조판서 최명길이 인조에게 죽음을 각오하지 말고 살아 있어야 대의와 명분을 찾을 수 있다며 설득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역사적으로 삼전도 굴욕의 장소이기도 한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통일신라시대 때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14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곳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으로 성 밖은 경사가 심한 반면에 안쪽은 완만해 견고한 방어가 가능했다.

남한산성 남문은 가장 큰 성문으로 서문으로 향하는 성곽을 따라가면 송파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일 정도로 서울 도심이 압축돼 들어오는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

 

남한산성 행궁 한남루를 지나면 작은 못이 한켠에 자리해 있다.  ⓒ지재호 기자
남한산성 행궁 한남루를 지나면 작은 못이 한켠에 자리해 있다. ⓒ지재호 기자

 

 

 

외삼문을 지나 전면에 마주하는 외행전. 이 곳은 신하들과 정사를 논했다.  ⓒ지재호 기자
외삼문을 지나 전면에 마주하는 외행전. 이 곳은 신하들과 정사를 논했다. ⓒ지재호 기자

 

남한산성에 있는 행궁(사적 제480호)은 임금이 한양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인조 4년(1626년)에 건립했다. 결국 10년 후 인조가 직접 피난처로 이용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남겼다.

행궁은 정문격인 한남루, 정사를 논하는 외행전, 인조가 침전으로 사용한 내행전, 일장각 등 건축물이 배치돼 있다. 특히 다른 행궁들과 다른 점은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갖추고 있고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가 있다는 것은 임시 수도의 역할이 가능 했다는 점에서 유일하다 할 수 있다.

청태종이 한남루 앞에서 내행전으로 투석기를 이용해 돌을 날려 공격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을 정도로 행궁은 뼈아픈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내행전 뒤로 이위정이 있는 후원은 경사가 완만하면서도 멀리 자연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방문객들의 필수 방문지로 사랑 받고 있다.

[한국조경신문]

 

내행전이 작은 문 사이로 보인다  ⓒ지재호 기자
내행전이 작은 문 사이로 보인다 ⓒ지재호 기자

 

 

 

인조의 침전으로 사용된 내행전  ⓒ지재호 기자
인조의 침전으로 사용된 내행전 ⓒ지재호 기자

 

 

 

후원에 있는 이위정에서 바라 본 전경  ⓒ지재호 기자
후원에 있는 이위정에서 바라 본 전경 ⓒ지재호 기자

 

 

 

재사를 지내던 재덕당 옆 바위에는 반석이라 써 있다. 병자호란의 굴욕을 잊지 않기 위한 것처럼 서글프게 느껴진다.  ⓒ지재호 기자
재사를 지내던 재덕당 옆 바위에는 반석이라 써 있다. 병자호란의 굴욕을 잊지 않기 위한 것처럼 서글프게 느껴진다. ⓒ지재호 기자

 

 

지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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