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식물노마드] 혼돈을 그리며
[최문형의 식물노마드] 혼돈을 그리며
  •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 승인 2019.11.13
  • 호수 56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문형 성균관대 초빙교수
최문형 성균관대 초빙교수

[Landscape Times] 혼돈은 세상 정중앙에 사는 왕이었다. 구멍이 하나도 없는 혼돈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도 아름다운 것을 볼 수도 좋은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존재였다. 혼돈의 친한 친구인 남해의 왕과 북해의 왕은 이 혼돈의 처지가 너무도 딱했다. 의논 끝에 둘은 혼돈에게 구멍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우정 어린 두 친구의 배려로 중앙의 왕 혼돈은 하루에 한 개씩의 구멍을 가지게 되어, 일곱 째 날에는 일곱 개의 구멍으로 세상의 모든 멋진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맡을 수 있게 되었다.

허나 이게 웬일일까? 일곱 개의 구멍을 가진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장자’에 나오는 유명한 우화이다. 학생시절 이 우화를 보았을 때는 공감이 가지 않았다. 감각기관이 없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느끼고 감수하지 못하는 혼돈의 원래 처지가 오히려 더 나았다는 말이 아닌가. 고대 중국의 괴짜가 쓴 장자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느끼는 것, 감수한다는 게 아닌가! 그런데 요즘 들어 우리 인간들의 삶을 생각하면 혼돈은 바로 우리 지구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구멍 없는 혼돈이 살아가던 시절은 각종 자연물과 동물과 식물들이 그저 어우러져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떤 때는 덩치 크고 힘센 공룡이 모든 환경의 지배자가 되기도 했다가 그들이 어느 날 무심히 사라지기도 했다. 서로 먹고 먹히면서 싸우고 속이고 이기고 지고 망가지다가 회복되다가 하면서 혼돈이라는 둥근 공 안의 세상은 굴러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변이 같은 똑똑한 종이 치고 나온다. 그들은 뇌가 발달하면서 점점 영리해지고 성대와 근육의 특수한 발달로 앞 다리를 들고 손을 사용하고 복잡한 분절음을 구사하며 협동할 줄 아는 생명체였다.

그들의 획기적인 진화는 지금도 후손들의 영원한 연구거리이다. 인간이라는 이 생명체는 각종 감각기관의 빼어난 발달로 못하는 게 없어졌다. 문화란 걸 만들고 예술과 정치와 종교를 창조했다. 오만해진 이 생명체는 자신은 이제 동물이 아니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한, 다른 생명체를 이용하고 부리고 때로는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신 같은 존재가 되었다. 실로 이 생명은 지구라는 생태계, 혼돈에다가 오랜 세월 하나씩 하나씩 구멍을 뚫어왔다.

혼돈의 마지막 구멍은 언제 만들어질까? 그 날은 모두의 공멸, 지구 최후의 날이 될 수도 있다. 뇌가 발달하고 감각기관이 대단히 세련된 이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을까? 대답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하지만 나는 십수 년 전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간이라는 폭군의 집안에, 생활에, 마음에, 간자(間者)처럼 끼어든 연약한 생명체를 알게 되었다.

퉁 쳐서 ‘식물’이라고 총칭되는, 움직이지 못해서 연약해 보이는 생명들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꽃과 싱싱한 잎과 달콤한 열매로 무장한 이 생명체들은 인간이라는 위험한 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인간은 식물들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길들이고 이용하고 바꾸고 했지만, 식물들은 빼어난 매력과 넘치는 생명력으로 인간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하기야 식물이 모두 자살이라도 하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먹거리부터 입을 거리에 이르기까지 생존이 힘들다. 숨조차 못 쉬게 된다. 인간 뿐 아니라 지구상 생명체들은 모두 식물에게 손 내밀고 의지해 산다. 어쩌면 이제까지 혼돈(지구)의 생명을 연장한 것은 식물인지 모른다. 식물은 지구 도처에서 생태계의 항상성과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려 무진 애쓰며 살아왔다.

서로 달라서 혼돈스러운 셀 수 없는 생명체들의 어울림은 식물의 몫이었는지 모른다. 원시시대 인류도 그렇게 살았었다. 모든 자연물에 정령이 살고 있다는 애니미즘이나 큰 동물을 사냥해서 먹고는 그 고마움을 표현한 형식으로서의 토테미즘 등은 원초적 인간이 지녔던 혼돈적 사고였다. 인간은 자연을 어느 정도 이용하고 활용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의 터전이자 원천인 자연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전 인사동 전시회에 갔다가 몇 십 년 동안 인간의 원초성과 동심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해 온 김홍태 화백의 세계와 접했다.

김홍태 화백, ‘원초성+동심’, 2017
김홍태 화백, ‘원초성+동심’, 2017

그리 넓지 않은 화폭을 오밀조밀 배열해서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들을 담아내려한 혼돈의 그림이었다. 귀여운 체형의 어린아이, 새와 동물들, 아프리카의 전승적 상징물들, 숲과 계곡, 고대 동굴에 나오는 소와 주술사와 사냥장면들이 빼곡히 들어가 있다. 인류의 전문명이 그 한 폭 안에 들어와 있는 듯도 하다. 작품 중앙에 이 문명을 관조하는 어린아이의 시선이 있다. 동심이다. 동심은 우리를 늘 설레게 한다. 떠나온 고향인 듯 돌아갈 본향인 듯 이루지 못하는 꿈인 듯 동심은 우리의 이상이다. 동심 속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고 사랑하고 뭉칠 수 있다.

사람들끼리만 아니다. 지구상에 있는 동물과 식물과 자연물조차도 동심 속에서는 혼돈의 하나이다. 그래서 동심이란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련한 그리움에 젖는다. 인류의 시조가 추방당한 낙원처럼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었기에. 마치 너덜너덜 구멍이 뚫려 버린 혼돈처럼 지구도 우리 마음도 망가지고 있다. 그래서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 아이의 마음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아이는 계층도 신분도 남녀도 나이도 구별하지 않는다. 혼돈 그 자체이다. 김홍태 화백의 그림은 쉽지 않다. 어찌 보면 혼돈 그 자체이다. 남해의 왕과 북해의 왕의 시선으로 보면 답답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혼돈에다가 구멍을 뚫듯 이 그림도 대 여섯 작품으로 분할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아이의 시선으로 보면 인류 역사와 문명은 한 개의 장이다. 장자의 시각으로 보면 모든 것은 하나의 삶일 뿐이다. 그 안에는 피아(彼我)가 없고 절대와 상대가 없다. 선악도 규범도 가치도 없다. 함께 생명을 영위해가는 혼돈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그 중심에 영악한 인간의 자멸과 공멸을 버텨주는 식물이 버티고 있다. 그래서 식물을 아끼는 우리 모두는 세상을 지키는 파수꾼인 어린아이이다.

[한국조경신문]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askmun@naver.com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의 다른기사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