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 성균관대 초빙교수
최문형 성균관대 초빙교수

[Landscape Times] 낙엽을 보면 쓸쓸해진다. 우리가 계절을 아는 건 온도와 습도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몸이야 그렇게 느끼겠지만 우리 마음은 다르다. 봄을 아는 것, 가을을 받아들이는 것, 모두 다 식물 때문이다. 가을은 식물의 갱년(更年)이어서 바쁜 시기다. 봄부터 주욱 가져왔던 생체 리듬을 바꾸어 겨울잠을 준비하는 때다. 곰이나 다람쥐처럼 식물도 겨울잠을 잔다. 동면동물들은 몸 속에 가득 양식을 비축하고 긴 겨울을 잔다. 하지만 식물은 몸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고는 겨울휴면에 들어간다. 준비하느라 바쁘다. 겨울이 되면 건조하고 추워져서 딱딱한 땅에서 수분을 빨아올리기 힘들어진다. 그러나 잎에서는 꾸준히 물이 빠져 나가면 식물의 생존은 큰 위협을 받게 된다.

그래서 식물은 봄부터 가을까지 열심히 일한 일꾼들을 자연으로 내보낸다. 낮과 밤 사이 기온차이가 벌어지면 이것이 바로 신호이다. 가지에 붙은 잎의 경계에서 세포자살이 일어나 잎을 떨군다. 아름다운 단풍과 쓸쓸한 낙엽은 바로 이 식물의 겨울채비의 일환이다. 우리는 식물의 가을변화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한다. 한 장의 단풍잎을 책갈피에 끼우며 한 해의 즐거움과 아쉬움을 쟁여둔다. 그 한 장에 담겨있을 수많은 이야기를 물으며 곱씹으며 가을을 맞고 가을을 보낸다. 집 앞 싸리비에 쓸리는 낙엽 소리는 진혼곡처럼 우울하다. 식물들의 세포자살의 현장은 상실감과 아쉬움을 가득 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가을이 되면 잎은 색깔을 바꾸고 세포자살을 준비한다.
가을이 되면 잎은 색깔을 바꾸고 세포자살을 준비한다.

‘잎들이 죽음을 맞이하는구나! 초여름 신록으로 생생하게 빛나며 그토록 우리를 달뜨게 했고 무성한 초록으로 웅장하게 세상을 압도했던 그들이!’ 사계절을 가진 복으로 우리는 식물을 통해 생의 유년과 청년과 장년과 노년을 경험할 수 있다. 다음 해 또 다음 해, 거듭될수록 우리 생각도 조금씩 묵직해 진다. 고대인들도 식물을 바라보면서 죽음과 삶을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Osiris)는 죽음과 부활의 신으로, 명계(冥界)의 지배자이다. 오시리스는 대지의 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의 아들이다. 생산의 신으로 이집트의 왕으로 선정을 베풀던 오시리스는 자신을 시기하던 동생 세트에게 속아서 살해되고, 몸은 토막이 되어 나일강에 흩뿌려진다.

하지만 아내이며 누이인 이시스가 그 토막들을 연결해서 미이라로 부활시킨다. 부활한 오시리스는 신들의 법정에서 사악한 동생 세트를 단죄하고는, 자신의 장자 호루스를 이집트 왕으로 세운다. 또 자신은 영생하는 명계의 왕이 된다. 오시리스는 부활과 재생을 상징 한다.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은 식물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태어났다가 죽어가고 또 태어나는 것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시리스는 곡물의 영이 신격화된 식물신(농경신)이기도 하다.

씨앗이 땅 속에서 온전하게 죽고 나서 엄청난 숫자의 후손들을 만들어 내는 신비와, 죽은 듯 보이지만 봄이 되면 어김없이 부활하는 식물들의 비밀을 나름대로 이해하려 한 고대인들의 생각이 돋보인다. 이 신화는 죽음과 삶을 오가며 장생하는 식물의 삶을 잘 보여준다. 지구상에는 수천 년을 살아가는 나무들이 있다. 나폴레옹이 7천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야영했다는 그 유명한 인도의 벵갈고무나무는 나무 하나가 수천 평을 차지하며, 그 큰 몸을 유지하느라 수천 개의 지지근을 땅으로 내리고 있다. 2016년에 미국에서 최고령나무로 자랑스레 발표한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브리슬콘 소나무는 당시 4847살이었으니 지금은 4850살이 되었다. 미국 세쿼이아 국립공원에는 자이언트 세쿼이아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떨어져 땅에 구르는 낙엽은 다음 세대를 기약하며 불사조로 살아가는 식물의 삶의 단면이다.
떨어져 땅에 구르는 낙엽은 다음 세대를 기약하며 불사조로 살아가는 식물의 삶의 단면이다.

이들도 보통 3000살 내지 4000살을 산다. 그런데 장수비결이 놀랍다. 그들 또한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처럼 죽음을 통과하며 장수한다. 미국 서부 지역은 잦은 산불로 유명한데 바로 이 산불 때문에 세쿼이아 나무가 오래 산다는 게 밝혀졌다. 나무의 두꺼운 수피는 물을 잔뜩 머금고 있어서 손으로 누르면 스펀지처럼 푹신하다. 산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나무의 지혜이다. 그러니 웬만해서는 불에 안탄다. 큰불이 나면 불이 커다란 줄기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관통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나무에 있는 각종 독성분을 다 태워 없애줄 뿐 줄기는 멀쩡하다. 게다가 세쿼이아 나무의 솔방울은 불이 나고 나면 조건이 좋아져서 잘 발아한다.

불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불사조(Phoenix)처럼 나무는 그렇게 회춘하고 부활한다. 그러다보니 이 국립공원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소방관들이 일부러 산불을 내기까지 한다. 도대체 웅장한 나무들의 장수비결은 무엇일까? 장생하는 나무들은 속은 썩어도 가지나 잎은 무성하게 잘 자란다. 나무의 중심부는 죽었다 해도 바깥쪽의 새로운 세대는 전혀 문제없이 팔팔하게 산다. 이 새로운 세대는 나무의 회춘이다.

삶과 죽음의 공존이다. 나무는 젊은 동시에 늙었고 죽는 동시에 살아간다. 그렇게 영원성과 지속성을 추구한다. 식물의 장생은 삶과 죽음조차 의식하지 않는 그들의 담담함과 무심함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왜 우리들은 가을 나뭇잎만 보면 쓸쓸해질까! 단풍과 낙엽을 보면서 곧 다가올 오시리스의 귀환, 내 인생의 다모작(多毛作)을 꿈꾸면 어떨까?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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