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식물노마드] 도시나무와 도시인
[최문형의 식물노마드] 도시나무와 도시인
  •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 승인 2019.09.23
  • 호수 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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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Landscape Times]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김동명 시인의 ‘파초(1938)’의 일부이다. 여름에 꽃과 열매를 피우는 파초에게 시인이 잔뜩 감정을 옮겼다. 윤혁민 씨가 작사한 ‘파초의 꿈’이란 가요도 있다. “낙엽이 나부끼던 어느 날인가, 눈보라 밤새 일던 어느 날인가. 세월의 뒤안길을 서성이면서, 한 많은 외로움에 울던 그 사람, 언젠가 땅을 딛고 일어서겠지. 태양의 언덕 위에 꿈을 심으면, 파초의 푸른 꿈은 이뤄지겠지.”

너른 잎을 가진 파초는 하늘을 향해 쑥쑥 자라서는 5m까지 오른다. 잎에는 평행으로 잔 곁맥이 있어 쉽게 찢어져 강한 바람에 잘 견딘다. 노란 열매는 크고 튼실하다. 잠깐 동안에 하늘로 오르는 나무를 보고 시인들은 부러움을 느낀 모양이다. 자신들의 소박한 꿈도 파초처럼 훨훨 피어오르기를 바란 것 같다. 파초를 자신과 동일시하여 꿈을 피우고 맺는 여리디 여린 나무를 노래했다.

자연의 나무는 우리에게 활력을 주지만 도시 속 나무는 좀 다르다. 도시 나무에게 심장을 옮긴 화가가 있다. ‘나무화가’라는 별명이 붙은 김종수 화가이다. 문명의 한 가운데인 도시에 옮겨진 나무를 보며 가슴을 촉촉이 적신 작품들이다. 가로수로 대표되는 도시나무는 팔이고 다리고 어느 것 하나 마음 놓고 뻗을 곳이 없다. 땅 속 깊이 들여야 하는 뿌리는 콘크리트 벽에 막혀버리고 대기 속으로 난장춤을 출 가지는 꺾이고 다듬어진다. 나무의 본성이라면 자연과 자유인데 도시나무는 부자연과 억압으로 포로가 되어 숨죽여 산다. 김종수 화가의 ‘무언의 세월’ 시리즈는 이 도시나무의 한과 소원에 잔뜩 귀 기울이고 있다. 혼자서 울분과 원망을 삭히느라 둥치가 벌겋게 된 나무를 그렸다. 하지만 그 옆의 나무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마음하얀 둥치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또 다른 그림은 가을의 절정에서 다사로운 붉은 단풍을 채색한 엄마나무와 엄마 따라 발그레 웃는 천진한 아기나무가 있다. 지옥 같은 도시 속에서 삭이고 적응하면서 꽃피우고 열매 맺는, 기특하지만 애틋한 나무들의 이야기가 도란도란 들려온다. 도시에는 소나무도 많다. 한국인들이 워낙에 소나무를 선호해서일까? 우리 아파트에도 꽤 많은 소나무가 이사를 왔다. 요즘 아파트들은 안전과 미관 때문에 주차장을 모두 지하로 옮겼다. 그 탓에 이곳의 나무들도 발 둘 곳이 없어졌다. 둥치의 높이만큼 뿌리를 두어야 하는데 말이다. 집 앞 작은 소나무는 애초에 건물에 바짝 붙여 심은 탓에 왼쪽 반신을 몽땅 잘렸다. 지나면서 보면 가슴이 아리다. 그래도 중심을 단단히 잡고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김종수, 무언의 세월, 유화, 1999년
김종수, 무언의 세월, 유화, 1999년

이런 불쌍한 나무들을 나무화가가 그냥 보아 넘길 리 없다. 현실에서는 잘리고 없지만 본성으로는 존재하는 가지와 잎을 작품 속에 살려내었다. 이제는 떠나보내고 없는 동기들과 아기들을 그렸다. 그들을 보내느라 흘린 피눈물이 작은 흔적으로 남아 서로를 도닥인다. 그래, 살다보면 모든 게 저절로 치유된다. 흔적은 남지만 그것조차도 추억이다. 화가의 사랑인 한국의 나무 ‘소나무’ 작품 시리즈는 현실과 본성이 같은 시공 속에 공존한다. 중앙에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둥치와 가지, 잎이 자리하고, 양 옆에는 해마다 다듬어 잘려나간 가지와 잎이 표현된다. 창호지에 비친 그림자의 형태로. 화가는 창호지를 쓰지 않고 그 느낌을 내기 위해 지난한 돌가루 작업으로 바탕을 만드는 인내와 인고를 선택했다. 나무의 심정을 그렇게 담아냈다. 인간의 포로가 되어 인간의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하는 나무는 애써 키운 가족들을 봄마다 잃고야 만다. 화가는 양 옆을 절단당하고 가운데만 앙상히 남은 나무의 현실을 안타깝게 그려내고는, 잃어버린 본성은 양 옆에 그림자로 담아 주었다.

우리는 단풍과 낙엽의 계절에 자연의 질서를 따라 떨어져나간 ‘할 일 다한’ 잎들은 애달파 하면서도, 정작 봄마다 겪는 도시나무의 상실과 상처는 알아채지 못한다. 아무 말 못하고 아무 저항 못하고,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처연하게 잘리어 태워진 가지와 잎들을 보며, 그저 쾌적하게 정돈된 환경을 위한 노동의 잔여물쯤으로 여긴다. 그렇게 나무는 길들여져서 수십 년을 넘기고 백년을 훌쩍 산다. 셀 수 없는 상처 속에 가족을 잃은 아픔을 꽁꽁 쟁여두고서 말이다. 우리네 삶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나무처럼 ‘그러려니’ 넘기면 ‘그렇게’ 살 수 있다. 살아낸다.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무언의 세월’을 담담하고 무심하게 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별 차이 없어 보이는 소나무처럼, 인고의 날들을 낱낱이 품은 도시나무처럼. 많은 이들이 아픔을 동반자로 산다. 어떤 이는 둥치에 큰 상처를 입고 어떤 이는 이식되다가 뿌리를 다치고 어떤 이는 가지와 잎을 무참히 살육 당한다. 세상에 아픔과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생명은 없다. 존엄사를 다룬 영화 ‘미 비포 유(Me Before You, 2016)’의 끝부분에는 전신마비의 청년 월이 죽는 장면을, 싱싱하고 푸른 커다란 잎이 너울너울 날려 땅위에 내려앉는 상징적 장면으로 처리했다.

월 또한 파초처럼 당당하게 자라서 열매를 맺고 싶었으리라. 그가 도시나무처럼 의연히 버티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김동명 시인이 노래한 파초의 고향은 무한히 자유롭고 무한히 사랑하고픈 도시나무와 도시인(문명인)의 ‘본성(Nature)’이었으리라. 조선시대의 성군 정조는 세손 시절 파초 한 그루를 섬돌 곁에 심어두고는 시를 짓고 그림도 그렸다. 파초의 크고 싱싱한 잎처럼 백성을 지키는 임금이 되겠다는 염원이 담겨있다. 그렇다! 나무는 식물은 하늘만 우러르면 된다. 태양만 맘껏 쪼이면 된다. 자연의 나무는 하늘로 하늘로 기세 있게 오르니까. 파초가 자라듯이 말이다. 문명 속에 사는 나무와 인간 모두, 땅을 딛고 일어나 태양을 바라며 파초처럼 꿈을 이루고 싶다. 도시의 소나무처럼 잘리고 다듬어졌다 해도 우리의 푸른 꿈, 우리의 본성이 실현되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askmun@naver.com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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